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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2)- 서양의인(西洋義人) 헐버트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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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세 역사전문위원
기사입력 2019-10-22

 

▲ 위키백과사전에 설명된 헐버트     © 편집부

 

1.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의 항의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고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인 밀사 헐버트는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미국 정부의 편파적 세계정책으로 인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10여 년 만인 4249(1916) 35일에 헐버트는 뉴욕타임즈지에 늑약 당시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수주일 전에 테오도르 루즈벨트 전 대통령이 윌슨 대통령에게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한 데 대해 항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었는데, 나는 루즈벨트야말로 1905년에 일본이 대한국을 강제로 보호국화하려 했을 때 (지금 대통령인) 윌슨보다도 더 국제상의 의무와 책임을 위배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힌 편지 한 통을 타임즈지에 공표한 바 있다. 루즈벨트 씨는 (루즈벨트)는 대한국황제가 보낸 친서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내가 말하자 나의 진술이 허위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에 응하여 그 보고서를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대한국이 루즈벨트 행정부에 의해서 공정한 처리를 받았는지의 여부를 미국 국민들이 판단해 줄 것으로 믿는다.

 

노일전쟁 초에 대한국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은 이 선언을 무시하고 한반도에 불법적으로 군대를 끌어들인 후, 대한국과 이른바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대한국을 일본의 동맹국으로 만들고, 러시아가 승전할 경우 러시아가 합법적으로 대한국을 점령합병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말았다. 본 한일의정서는 특별히 한국의 주권침해방지를 보장했으나 다만 일시적인 성격을 전쟁 중의 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대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조약국들은 다 같이 이 한일의정서가 분명히 대한국에 대한 주권침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 같은 조처는 일본이 오래지 않아서 대한국에 대하여 보호국을 수립함을 의미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노일전쟁이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약의무를 준수수행할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자, 대한국황제는 자기나라의 자치권이 이웃 동맹국 일본에 의해 침해될 위기에 직면했음을 직감하고, 미국과 맺은 한미조약 제1조를 상기하게 되었다. 대한국황제는 본인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약 이행을 촉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나는 대한국이 군사적으로 취약해지면 일본의 국가안보상 대한국이 일본의 보호국화될 기회를 일본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국이 영세중립국이 될 때까지는 일정기간동안 대한국을 (미국 및 각 조약국들이) 공동보호국화함이 보다 합당한 조처라고 대한국황제에게 충고했고, 대한국황제는 나의 의견에 따라서 이 조항을 친서에 삽입했던 것이다.

 

나는 이 친서 전달의 임무를 부여받자마자 주한 미국공사 모건에게 달려가 내 임무를 분명히 밝혔다. 나는 모건 공사에게 일본의 부당한 한국지배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국정부가 이에 개입하여 거중 조정(居中調停)해 주도록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건으로 우리 미국정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내 임무를 밝히지 않은 채 서울을 떠났다. 모건은 내 말을 경청하더니만 여하한 반대말도 하지 않고 미국에 도착하면 국제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의뢰하도록종용했다. 그러한 조치 이외에도 모건 공사는 공사관의 우편 행낭편으로 이 문서(친서)를 미국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송달된 대한국황제의 친서를 즉각 찾아 들고, 나는 워싱턴의 고위 관직에 있는 나의 오랜 지기를 찾아가서 상의하고, 그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을 상면할 수 있는 최선책을 알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 친구는 친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이 편지를 가지고 온 장본인은 대한국황제의 중요한 서한을 가지고 지금 워싱턴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것은 외교문제이므로 친히 만나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문서를 국무성으로 전달해야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편 국무성 당국은 바쁘니까 다음날 가져오라고 했다. 그들은 얼마나 바쁘길래 빈사상태에 놓여 있는 한 우방으로부터 전달된 편지 한 통조차 접수할 수 없단 말인가! 대통령비서관과의 면담마저 거부당하고 차관 한 명을 만났을 때 그는 매우 온화한 말투로,

헐버트 씨, 우리는 이 편지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편지를 국무성으로 가져가라는 지시를 받은 줄 압니다. 이곳에서는 이 같은 문서를 접수할 수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편 기자들은 나의 도미 목적을 폭로하라고 졸라대었다. 나는 분별 있는 인사이외에는 나의 임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없기에, 어떤 공식적 루트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누설되었다는 증거를 잡았다. 나는 그 때 그 곳에서 신문기자의 요구에 응해 사건 전모를 밝히지 못한 점, 그리고 미국 국민에게 한 우방국의 황제특사가 우리 정부 문전에서 예의바른 경청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내가 이 문제를 그들에게 설명하기도 전에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먼저 누설한 것은 정말 무례한 짓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날 나는 국무장관과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공무상 일이 있어 다른 날 다시 방문해서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이 날이야말로 미국 정부는 대한국에 보호국이 수립되었고, 대한국 정부는 이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성명을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통고받았다. 미국 정부는 단 한 번의 외교적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일본 정부의 뻔한 성명을 받아 들여 서울주재 미국공사관을 철수하라는 전문을 발송함으로써, 이 허약한 조약국과는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 나라와 수교한 지 25년이 되었고 그동안 대한국을 위해서 공평한 조처와 야수적인 무력적 침략을 저지반대하는 등 공정성을 옹호 및 찬성해 왔으며, 대한국은 다른 열강보다도 더 생산적인 기업의 기회를 미국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대한국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미국은 거중조정을 해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나는 국무장관을 면회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베이콘 국무차관, 애디 국무차관보 등이 동석했고, 기타 대한국공사관의 관리가 배석한 것으로 기억된다. 막상 국무장관을 만나자 나는 대한국황제의 신임장을 받지 않은 기술적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무장관은 애디 차관보에게 내가 특별신임장을 휴대하지 아니해도 이 문제를 토의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그가 불가하다고 대답하자 루트 국무장관은 문서를 받아 매서운 눈초리로 나에게 건네주면서 힐책하듯이 나에게,

헐버트 씨, 당신은 우리가 일본과 분쟁하기를 원합니까?”

라고 쏘아 붙였다. 애디 국무차관보의 노련한 결정으로 나는 토의를 중단하고 말았다. 그 뒤 며칠 후에 미국의 저명한 국제변호사 한 분이 한미조약문의 사본을 가지고 루트 국무장관에게 가서,

우리 미국이 유사시 대한국을 위해 거중조정(good offices)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읽어 보라

고 요청했더니 그는 그것을 읽고 나서,

나는 그런 대목이 있는 줄 몰랐다.”

고 외쳤다.

 

다음날 대한국황제로부터 전문 한 통을 접수했는데, 그 전문에서 대한국황제는 을사조약은 협박에 의해 체결되었기에 무효임을 선언했다. 더군다나 일본은 외무대신을 강박하여 서명동의를 얻었고 황제 자신은 결코 서명한 일이 없으며, 따라서 문서상의 서명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나는 이 전문을 가지고 재차 국무성을 방문했고 베이콘 국무차관이 대한국황제의 전문을 접수보관했다. 이로부터 수일 후 루트국무장관은,

대한국황제는 전문에서 친서의 비밀보장을 요구했고, 또한 그는 최종적인 조치가 이미 단행된 이상(을사늑약 체결) 미국정부로서는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

라는 내용의 회답 서한을 내게 보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미 온갖 개입을 단행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왜 비밀문제를 들고 나서는지 모르겠다. 얼마 후 한국에 돌아와서 모건 공사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무심코,

우리는 일본의 대한국 탈취기도를 미리 알고 있었으나, 이처럼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라고 실토한 바 있다.

 

여기서 일본의 대한국 점령(을사늑약) 2개월 전에 미국 정부는 주한미국공사 알렌 박사를 왜 경질했는가라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이에 대해 애매한 대답을 하고 있지만 기타 각료들은 알렌 박사가 대한국황실과 너무나 친밀한 사이이므로 서울주재 미국공사를 경질하지 않고는 미국정부가 결정한 대한정책을 수행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정책은 언제 결정되었는가? 모든 것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아마도 포츠머스조약 때 결정된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대한국 지배에 미국정부가 동조한 점으로 보아 이 말은 정확한 답변인 것이다. 나는 상황증거에 의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광무황제의 친서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이 문제에 대한 조처를 취할 때까지 대한국황제의 친서를 접수하지 않고 2일간 보류한 이유가 무엇이며, 만약 그가 그 당시 대한국의 자치권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침해되었다고 믿었다면, 왜 친서를 접수해서 소신껏 이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했을까?

 

만약 루즈벨트 대통령이 내가 신임장 없는 특사이므로 나를 만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운다면, 내가 신장 없이 이와 같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려고 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을 왜 몰라준단 말인가? 또한 대통령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백악관의 차관보 중 한 사람이 친서 내용을 더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는데 그 이유를 묻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문제에 관한 한 루트에게는 책임이 없고 필시 지시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 그가 그 지시에 동의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동의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가 불운한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과실이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 헐버트의 증언

 

을미사변이라는 공전절후의 치욕을 당한 고종임금은 20여 년간 조선을 좀먹어 온 왜구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관파천을 단행한 후, 독립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정(帝政) 대한국을 표방하고 광무개혁을 통하여 시정개혁(施政改革)을 주도하면서 항일의 선봉이 되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은인자중하면서도 신임할 수 있는 인재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도록 촉구하는 많은 밀지를 내리고, 또한 왜구들에게 체포된 의병장들이나 애국지사들의 대부분을 특사형식을 통해 조기 방면토록 조치하는 방법 등으로 의병항쟁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이등이나 다른 왜구들로부터 배일운동의 두목이라는 지목을 받고 궁중에 철저히 감시당한 상태에서도 충신들을 통해 밀지를 내리며 계속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한편,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도 밀사들을 보내어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제침략의 실상을 세계만방에 알리도록 하기도 했다.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강제퇴위당한 후에도 대를 이은 융희황제와의 긴밀한 협의 하에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고, 강제합방 이후에는 해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스스로 망명을 결행하기 위해 이상설이 주도하는 해외 광복운동지사들과 끊임없이 그 실행을 도모했다. 그러나 왜구들의 너무나도 철저한 감시 하에서 스스로의 망명이 현실적으로 거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 그 때까지도 주색에 빠진 망나니 행세를 위장하고 있던 의왕에게 대신 망명하라는 밀지를 내렸으므로, 광무황제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의왕은 본격적으로 상해망명을 기도하게 되었다.

 

광무황제는 또한 대한국 황실의 혈통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왜구들이 강요하는 영왕과 왜왕녀와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마침내 간교한 왜구들과 친일파매국노들에 의하여 독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한 대한국과 황제주변의 정황을 외국인으로서는 가장 측근에서 황제를 보필한 바 있는 헐버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그는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던 서기 1942년에 미주의 대한국인들이 항일결전의지를 다지기 위하여 개최했던 대한국 자유회의에 초빙받은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증언을 남겼다.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한다.

광무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적이 결코 없다. 기꺼이 순종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적도 결코 없다. 휜 적은 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의 협조를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럽 열강에 호소했으나 강제퇴위당하여 전달되지 못했다.

그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군주였다.

대한국인 모두에게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영원히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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