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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7) -공화제와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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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세 역사전문위원
기사입력 2020-01-01

 

* 공화제대두의 국제적 요인

주로 국제도시인 상해에 다수 몰려 있던 공화국추진자들이 당시의 세계적 사조(思潮)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은 확실하다. 특히 그들이 몸담고 있던 지나지방의 정세 변동에 극히 예민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도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지나정세를 편견 없이 살펴볼 때 우리는 비로소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편력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지방에서 입헌군주제와 전제군주제 사이의 논란이 활발해진 것은 의화단운동 이후의 일로 알려져 있다.보황(입헌군주제)파의 거두인 양 계초가 4235(1902)에 망명지 요코하마에서 창간한 신민총보는 보황입헌운동의 잡지로서 공화사상에 가까운 논조를 펼쳤다. 이에 대하여 완전히 만주족을 배척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논리로서의 공화제 혹은 입헌제를 주장한 것이 손문이었는데, 그도 또한 망명지 일본에서 청국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혁명조직을 결성하였고 친일반로적(親日反露的)노선을 견지했다. 노일전쟁 때 그는 러시아군의 만주진입에 항의하며 일본 육사에 유학중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천여 명에 달하는 동조자들을 확보했다. 손문의 공화제 주장은 주로 한족(漢族)이 많이 거주하는 상해를 비롯한 지나 남부지방으로 전파되었고, 그것은 곧 멸청흥한(滅淸興漢)의 민족해방운동 성격을 띠고 한족사회에 널리 퍼져갔다.

 

손문은 청국조정을 양인(洋人)의 조정이라고 표현하고 민주공화제를 제의했는데, 특히

미국의 헌법과 제도를 배워서 전제군주제를 타도하자.”

고 주장했다. 노일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보황입헌파의 장건은 공화제의 대두에 대하여 어떤 변화와 조치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노일전쟁의 승부는 입헌(군주)제와 전제(군주)제의 대결이다. 지금 지구상에 완전한 전제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청나라 같은)1개의 전제국가가 뭇 입헌(군주제 및 공화제)국가들에 대항해서 요행을 바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고 체제 변혁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에 따라서 청국 정부는 입헌군주제로의 변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손문을 위시한 혁명파 측에서는 정말로 입헌군주제로 개혁이 될 때 청국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만주족 정권을 몰아내는 데 오히려 큰 장애가 될 것으로 보고 정부 요인들에 대한 폭파와 테러 등을 자행하였다. 친일적이었던 손문 등은 일본중의원 의원집에서 공화혁명을 지향하는 중국혁명동맹회를 만든 후, 4239(1906)부터 지나 남부지방에서 여러 번 무장봉기를 획책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청국 조정은 같은 해 713일부로 ‘9월에 예비헌법을 선포할 것과 4241(1908)부터 점차 입헌제로 옮길 것을 선언하였으나, 4240(1907)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청국에도 몰아닥쳐옴과 함께, 4241(1908)에 함풍제의 뒤를 이어서 어린 선통제가 즉위한 후에 섭정인 재풍(선통제의 부친)이 원세개 대신 성선회를 중용하면서 황제지위를 불가침으로 굳히려는 헌법개악을 추진함으로써, 혁명파는 물론 청국 정권에 동조적이었던 입헌파에게도 큰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 4244(1911) 1010일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혁명파들이 중화민국을 선언하고, 손문도 급히 귀국하여 총통선거를 통해서 초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손문은 미국과 프랑스가 혁명파에 대해서 우호적일 것으로 보고, 러시아와 독일은 청국 편을 들 것으로 파악했다.

 

혁명 열기가 고조되자 원세개도 손문과 타협해서, 손문이 일단 황제를 폐하고 임시총통에 오른 후 다시 북경에서 원세개가 총통으로 취임하기로 합의를 본 후 혁명파에 가담했다. 당시 원세개는 영국과 미국의 재정원조에 대한 보증을 확보했고, 손문은 일본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고, 4245(1912) 310일에 마침내 원세개가 총통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처음부터 혁명파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원세개는 약 1년 후인 4246(1913) 426일부터 의회를 장악하려는 혁명파에 대한 무장탄압에 돌입했다. 원세개는 입헌파와 함께 정권을 장악하고 손문의 국민당을 해산시켜 버림으로써 혁명파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원세개는 일본의 개입을 막기 위해 동년 105일에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자본으로 추진되는 동삼성의 철도부설계획을 승인해 주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에 앞서 4240(1907)에 러시아는 일본과 비밀협정을 맺어서 외몽골에 대한 러시아의 특수 권익을 만주에 대한 일본의 특수 권익과 맞바꿔서 인정했다. 그리고는 몽골왕이나 귀족들에게 청조로부터 독립하도록 배후공작을 펼쳐서, 신해혁명이 터지자 4244(1911) 121일에는 마침내 몽골독립을 선언토록 하고, 청국군을 내몰고 몽골독립정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4245(1912) 7월에는 일본과 제3차 비밀협정을 맺어서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의 티베트 침략을 러시아가 인정하는 대신, 일본이 몽골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하여 러시아-몽골협정을 맺고, 몽고에서의 통상철도부설전신부설광산개발 등 러시아 자본의 투자와 이용에 대해 승인하라고 원세개에게 강요하여 마침내 몽골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그에 따라서 4246(1913) 107일에 중화민국을 승인했다. 영국 또한 티베트를 장악하면서 원세개와 협상을 벌인 끝에 그 전 해인 4245(1912) 107일에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4247(1914) 3월에는 티베트의 자립을 주내용으로 하는 협정을 맺어서 티베트를 영국의 전초기지로 만들었다.

 

그처럼 위압적인 세계열강들의 움직임이 원세개로 하여금 영국의 경쟁상대국인 독일과 접근하도록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원세개는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일동맹을 내세워 산동반도에 침략한 후 독일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익을 탈취하고 그대로 눌러 앉았고, 중화민국에 대해서 21개조에 달하는 반식민지적 불평등조약을 강요했다. 내분으로 인하여 일제에 적절히 대항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원세개는 적당한 선에서 일제와의 타협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지도력의 강화를 위하여 제정을 추진했다. 그 배경에는 침략자인 일제 자신이 강력한 전제적 천황제 이념에 의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등부국강병을 달성한 것을 참고삼으려는 원세개의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에 대하여 원세개의 고문이었던 미국인 굿드나우는,

중국인민의 문명도가 아직 공화제를 펼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어서 군주제가 타당하다

고 옹호하고 나섰고, 영국프랑스러시아 등도 자신들의 경제시장만 유지된다면 체제 자체에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황정복고는 무난히 추진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4248(1915) 1212일에는 원세개가 추대받는 형식으로 하여 황제 위에 올랐고, 다음 해 11일에는 홍헌(洪憲) 원년을 선포했다.

 

양계초는 굴욕적인 21조 문제로 인해 갑작스러운 황제 즉위가 혁명파에게 빌미를 주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원세개가 그의 의견을 무시함에 따라서 반원세개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실상 원세개의 황제 즉위는 시기상조였기 때문에 지나의 정세는 그로 인해 불안한 내란상태로 치달았고, 상황이 급격히 심각해지자 불과 3개월 만인 4249(1916) 322일에 스스로 제정(帝政)을 취소하고 말았다. 낙망한 원세개는 66일에 병사하고 말았고 지나 전국은 군벌할거의 난세로 빠져들었다.

 

그처럼 지나 정세가 난맥상을 보이는 가운데 미국도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하면서 중국 측에도 참전을 권유하자, 이미 영국프랑스이태리러시아 등으로부터 지나 지방에서의 이권을 비밀히 양해받은 바 있으면서 중국의 참전을 반대해 오고 있던 일제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어 중국 정부의 대표 단기서와 유리한 조건의 밀약을 맺고 중국도 전쟁에 참여토록 종용했다.그러자 미국은 지나 지방에서 일본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저지하려고 중국의 참전문제를 보류토록 정책을 바꾸는 등, 지나 지방을 둘러 싼 국제정세는 극히 묘하게 돌아갔다. 그 기회에 유력한 군벌인 장훈은 청조의 재건을 기도했고, 중화민국 초기부터 공교회(孔敎會)를 조직했던 강유위도 그에 합세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4250(1917) 71일에 청조의 어린 계승자 부의를 옹립하고 선통 9513일로 기원까지 고쳤으나, 일제의 비호를 받은 단기서가 북경을 함락함에 따라 불과 12일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의 공작에 힘입어서 대세를 휘어잡은 단기서는 내각총리가 되어 풍국장을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지나 지방에서의 우위를 굳힌 일제는 또한 같은 해 11월에 미국과도,

중국에 있는 미국의 권익을 지키고, 중국의 문호개방정책도 인정하며, 동삼성 및 기타 중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특수 권익을 인정한다.”

는 내용의 석정(石井:이시이)-랜싱(Lansing)협정을 맺었다. 이때부터 손문은 민국 원년의 약법을 지키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군벌 내부의 알력을 틈타서 남방 군벌의 세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1차 대전이 끝나 가던 4252(1919) 1월에는 다시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간섭하여 남북 군벌 간에 화해 교섭이 시작되는 등 난세 속에 군웅할거시대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에서 일본유학생 출신의 진독수는 청년잡지를 표방한 신청년을 통해서,

서양식의 신국가를 건설하고, 서양식의 신사회를 조직해서 현대의 생존에 적응하자

는 논리를 전개하며 동양적인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서양식 공화제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새 시대의 사상가로 각광을 받으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 북경대학장 채원배에 의하여 전격적으로 북경대학의 교수(문과과장)로 발탁되기도 했던 진독수는, 공자와 유교사상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신청년을 통하여 널리 전파했는데, 후일에 비림비공(非林非孔) 운동을 펼친 공산주의자 모택동도 그런 영향을 깊이 받음.

 

그처럼 1차 대전 후반기에 벌어지고 있던 지나지방 및 세계 열강간의 정세변화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관내(關內:산해관 남쪽)에서 활동하던 대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현실이었다. 거기에다가 1차 대전 중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볼셰비키 혁명의 반봉건 공산주의 사상이 전 세계 약소민족들의 지식인 사회에 열병처럼 번져가고 있었으므로, 세계열강(특히 미국)의 힘을 빌어서 독립을 얻고자 하는 외교노선가들에게 있어서 공화주의 노선이 강력하게 대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노선자체가 친미적친중적친쏘적 등으로 각각 성향이 판이하게 다른 여러 가지의 공화주의 노선으로 사분오열됨으로써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수립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난맥상을 보이게 된 데 대해서 응분의 책임이 없다고는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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