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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통사(108)- 혼돈 속의 공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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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세 역사전문위원
기사입력 2020-01-15

 

▲ 상해 임시정부 초기 사진     © 편집부

 

8.15 이후 대한국의 터전인 한반도는 일제에 강탈당했던 대한국의 본래체제로 광복된 게 아니라, 남북에 각각 미국과 쏘련을 상전처럼 받드는 대단히 비주체적인 공화국들이 들어섰다. 서로 민족광복투쟁에 있어서의 정통성과 민족주체성을 주장하는 두 공화국의 비주체적 지도층들은, 민중의 실제 염원은 여하간에 제정(帝政) 대한국으로 광복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니, 일제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으면서도 엉뚱하게도 한민족의 상전 노릇을 하려는 쏘련이나 미국이 공화제의 국가였기 때문이었던 영향도 컸다. 인류사회에 남아 있는 구시대적 제도들을 모조리 타파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한국의 체제는 어차피 타도대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범국가인 일본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자상하게 보살핀 미국 측이 같은 연합국인(미국 측은 임정을 끝까지 승인하지 않았지만 연합작전은 펼쳤었음) 한반도에서 보여 준 태도는 극히 실망스러운 것이 많았다.

 

특히 오랜 미국망명생활을 했던 착실한 기독교도로서 미국 측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남한에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은, 4259(1926)의 융희황제 붕어(崩御)이후 대한국의 잠정적인 최고 주권자로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영왕의 귀국을 한사코 방해하는 한편, 조선시대의 어진 임금들께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염려해서라도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을 모든 독재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영구적 집권을 획책하였다. 그것은 마치 임정시절에 미국이 일본 대신 통치해 달라는 망발을 해서 임정의 탄핵을 받고 임정대통령직(그것도 제멋대로 대통령 노릇을 한 데 불과하지만)에서 쫓겨남으로써 이룰 수 없었던 자신의 권력장악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광분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디 가서도 민족주체성이나 역사적 정통성을 주장하기는 힘들었던 이승만에 대한 민중의 반대는 열화와 같아서, 이승만이 억지로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숱한 동족상잔이 야기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그나마 역사적 정통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지고 있던 임정의 실제적인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암살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받았고, 배후가 밝혀지지 못한 백범 암살사건은 남한정권의 정통성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곧 한민족사상 최대의 비극인 6.25 동족상잔의 도화선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8.15의 감격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다는 오늘날 두 공화국의 실태는 어떤가? 쏘련의 사회운영방식이었던 마르크스-레닌(M-L)주의를 둘도 없는 복음 정도로 믿고 따르던 북한은, 공산권의 전반적인 붕괴와 무책임한 쏘련의 해체 및 지도층들의 지나친 대외적 경직성으로 인하여, 구호로나마 외치던 자력갱생의 문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일 먹을 식량을 걱정해야만 할 심각한 생존적 위기에 빠졌다. 에너지와 무기체계 등을 거의 대부분 공산권으로부터 공급받다시피 하며 체제유지를 위한 지나친 군비경쟁을 강행하고 있었던 까닭에, 공산권의 와해 이후 옛 공산권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된 북한당국자들은 결국 소모적인 군비경쟁에 자체적으로 턱없이 과다한 지출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곧 인민에게 무한대의 절약과 노력봉사만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체제운용상의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인민은 고통의 나락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시대착오적인 일가일당(一家一黨) 우상화정책을 깨끗이 청산하고, 세계 각국과 크게 밑지지 않는 범위에서부터활발한 경제적 교류를 전개하고, 남북 간 긴장완화를 통한 군비의 단계적 축소를 통하여 인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어야만 한다 - 는 데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해 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만일 체제운용상의 변화가 어쩔 수 없이 초래될 때 북한정권의 정통성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북한이 기아선상의 파산지경에 빠졌다고 해서 남한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한은 8.15 후 반세기만에 총 외채가 1,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세계 10대 채무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외채를 한꺼번에 갚아야만 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 국가의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 증발해 버림으로써 일시에 국가적 파산위기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자본주의 퇴폐문화가 창궐해 온 남한으로부터 전 한민족사회로 퍼져가고 있는 정신적도덕적 파탄은 한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반드시 하루속히 통일되어야만 할 한민족국가의 존립기반을 뒤흔들고 있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지역갈등은 이미 한민족 사회를 두 개가 아닌 다섯, 여섯 개의 분열된 이기적 지역할거 양상으로 몰아가고 있는데도 정치가들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급속한 공업화에 따른 핵가족화의 속도와 맞추어 인륜이 파괴되어 온 지는 이미 두 세대 째로 접어들고 있어서,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인륜이라는 단어자체가 대단히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여겨지게 되고 있다. 사회의 기강이 전혀 잡히지 못하고 하극상과 각종 패륜이 난무하게 된 것도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들이 교정되지 못하고 더욱 심화되어 갈 때 남북한을 막론하고 희망적인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한민족사회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8.15이후 민족정통성 있는 주체적 정권이 들어서지 못하고, 외세에 영합하는 교활한 정상배들에 의하여 동족상잔이 야기되면서 민족적 동질성이 철저하게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민족공동체의식과 민족공동체적 역사관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집단이란 이미 민족도 공동체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8.15 이후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제는 민족역사적 정통성이 확고한 중앙정부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그 중요성은 민족적 파탄지경으로 전락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결코 퇴색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비록 반세기나 늦어지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한민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정통성 있는 중앙정권이 탄생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그 정통성을 구심점으로 민족의 역량이 한데 모아져서 비로소 지금의 민족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정통성 있는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 이 물음은 이 난국을 해결하여 자손들에게 인륜이 잘 지켜지는 행복한 미래를 남겨 주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의 한민족이, 외래사상과 외래문화(특히 서양문화)에 찌들어 있는 모든 편견들을 버리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잘 생각해 보아야만 할 문제이다.

 

 * 백범 김구 선생이 구국교육사업에 열중하고 있던 4241(1908:32세경)에 황해도 일대 강습회에 나섰을 때, 배천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군수 전 봉훈이 김구선생 만세하고 외치자 김구 선생은,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해서만 부르는 것이, 황태자도 천세라고밖에 못 부르는데 이게 무슨 망발이오!”

라고 나무란 사실이 있다. 김구 선생이 광무황제를 대외적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높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김구 선생이 상해임정에 참여한 것은 삼일운동 후 망명을 결심하고 상해로 간 후의 일이며, 4252(1919) 8월에 임정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 가서 임시정부 문지기가 되겠다는 뜻을 알렸다.

 

   도산 선생 또한 상해임정이 세워진 지 한 달이 넘어서야 미국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했고, 처음부터 난맥상을 보이던 임정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다가 628일에 이르러서야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내무총장 및 국무총리직무대리를 맡아 이끌어 나가고 있었으며, 항일애국자로 이름이 잘 알려졌던 백범 선생을 문지기가 아닌 경무국장에 임명하여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민족자주독립의 선봉에 섰던 두 사람이 각각 임정 수반의 명칭으로 집정관총재(안창호)와 국무령(김구)을 선호했던 데 반하여,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를 부탁하러 다니기에 바빴던 외세추종자 이승만이 대통령 명칭을 고집했던 사실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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