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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위만은 번조선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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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8-09-28

본 글은 아래와 같은 3부작의 (2부)입니다.
(1부) 단군조선의 쿠데타와 허구의 기자조선
(2부) 북부여의 쿠데타와 위만조선의 실체
(3부) 고구려의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

지난 (1부)에서는 단군조선의 쿠데타로 본 기자조선의 허구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B.C 2333년 건국된 단군조선은 강역이 넓어 진한(진조선), 마한(막조선), 번한(번조선)으로 나누어 통치되었으며, 진한(진조선)은 단제께서 직접 다스렸고 마한과 번한은 왕을 임명해 다스렸다.

대륙 동부에 있던 번조선의 땅에 은나라 사람 기자가 들어와 살게 되었고, 약 770년 후 그 후손이 되는 기후가 쿠데타로 번조선왕이 되어 6대를 내려가다 마지막 왕 기준 때 위만이 쳐들어와서 번조선의 도읍을 점령하게 된다. 기준은 도읍을 위만에게 빼앗기자 번조선의 남쪽(산동성과 강소성의 海 지방)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운다.

기준은 기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고 기자와 기후로 연결되는 직계 조상들을 전부 왕으로 추존하여 41대의 왕계를 만든다. 그래서 실제 왕위에 있지도 않았던 기자 이하 35명의 기씨 조상들이 추존왕이 된다.  참고로 마지막 6대는 실제로 번조선에서 왕 노릇을 했다.

명나라의 속국이 된 조선왕조와 일제의 앞잡이가 된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41대의 왕계(35명 추존)를 기자조선이라 하여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로 만들었다. 즉 47분의 단군에 의해 2,096년간 다스려졌던 단군조선을 반토막낸 것이었다. 그런 기자조선이 위만에게 멸망하여 위만조선이 섰고 그 위만조선이 한사군(漢四郡)으로 바뀌었고 그 위치가 대동강 평양이라는 것이 이 나라의 정신을 썩게 한 조선왕조와 일제의 이론이었다. 

▲ 명나라의 속국 조선왕조에 의해 반토막이 난 단군조선. 조선왕조는 단군조선의 후기 1/2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일제는 전기 단군조선을 신화의 나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이 이론이 2008년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을 몰아내고 위만이 집권한 것을 두고 기자조선이 무너지고 위만조선이 섰다고 하는 한국의 사학자들은 사대모화사상에 오염되어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럼 북부여는 어떤 과정을 거쳐 단군조선을 계승하게 되는지, 또 북부여에는 어떤 쿠데타가 일어났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단군조선의 종국(終國)과 북부여의 계승

B.C 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어 47분의 단군에 의해 2,096년간 통치된 조선은 드디어 B.C 238년 마지막 단제이신 고열가단군 때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참고로 단군조선의 폐국(閉國) 1년 전인 B.C 239년 해모수에 의해 북부여가 생긴다. 

고열가단군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말씀하기를

“옛 우리 선조 열성조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랫동안 잘 다스려졌지만 이제 왕도는 쇄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하건데 그대들 오가(五加)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고 하시고 이튿날 마침내 제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니 이에 오가가 나라를 함께 다스리기(共和政)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참고로 단군조선의 폐국 1년 전인 B.C 239년 해모수는 몰래 수유(기비)와 약속하고 옛 도읍인 백악산을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으며,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고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번조선왕 기비는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서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아마 기비 때문일 것이다. B.C 232년 해모수는 마침내 오가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6년간의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고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해모수의 등장을 정변 즉 쿠데타로 집권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5가에게 추대되어 공화정을 폐하고 제위에 오르는 단군으로 봐야 할지 그건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그런데 고열가단군이 물러나기 전인 B.C 239년 해모수가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는 백악산을 점령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고, 기비를 번조선 왕으로 삼은 것은 분명 일종의 쿠데타적 사건이 아닌가 한다. 

나약한 고열가단군이 물러나고, 5가에 의한 6년간의 공화정이 실시된 후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모수가 단군으로 추대된 것으로 보아서는, 비록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일부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키긴 했어도 6년간이나 5가가 공화정치를 하는 등 상당히 민주적으로 진조선이 운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B.C 232년 해모수가 무리를 이끌고 5가들을 회유하니 마침내 공화정치를 철폐하게 된다. 이에 만백성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이 과정을 액면 그대로 회유로 봐야 하는지 무력시위를 앞세운 강압으로 정권을 뺏은 것으로 봐야 하는지는 역시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여하튼 해모수의 등장은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북부여의 시작이었다. 비록 국호는 조선에서 북부여로 바뀌었지만 단군이란 제호(帝號)는 그대로 썼다. 

▲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단군. 김산호화백의 작품이다.  

이렇게 시작된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로 이어진다. “고구려는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한다 했다.”고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라는 국호는 해모수의 고향 지명에서 기인되었음을 알게 된다. 

해모수단군은 B.C 221년 기비가 죽으니 그의 아들인 기준을 번조선의 왕으로 봉한다. B.C 195년 연나라 출신 위만이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런데 번조선 왕 기준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받아들이고 상하 운장을 떼어서 봉지로 준다.

이렇게 단군조선의 핵심인 진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북부여를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그 이유는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끊기 위함일 것이다. 단군조선을 반토막내고 또 적장자인 북부여를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대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등장시킴으로서 조선왕조는 고구려를 단군조선과는 아무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단칸 셋방에서 시작된 초라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고구려가 만일 단군조선과 북부여를 계승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그마한 단칸 셋방에서 시작된 개인회사라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동북아 최대의 재벌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고구려가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명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오고 천제의 아들이다.(出自北夫餘天帝之子) ”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하늘의 임금인 천제는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북부여의 단제인 것이다. 이러한 북부여를 역사에서 지워버린 조선왕조와 식민사학계는 민족의 역사 앞에 오강들고 벌서고 반성문을 써야한다.  

▲  위만이 기준을 공격했을 당시 엄연히 북부여와 낙랑국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를 일제는 우리 역사에서 지운다. 그리고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으로 내려간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동부 평야지대이다. 여기도 번조선의 강역이었다. 海는 바다가 아니라 해(海)라는 지방 이름이다.

위만조선은 나라인가? 도적집단인가?

계속해서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북부여 2세 모수리단군 원년인 B.C 194년 결국 기준은 위만에게 패해 해(바다가 아니고 산동성의 ‘海’라는 지방)로 들어가고, 3세 고해사단군 42년 B.C 128년에 위만의 도적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4세 고우루단군 원년 B.C 120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고, B.C 118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북부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한다. 결국 B.C 108년 한나라가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잇는 북부여는 위만과 우거를 국가가 아닌 도적집단으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기준은 엄연히 번조선의 왕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는 위만/우거와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북부여는 위만을 도적집단으로 불러 ‘토벌’과 ‘침략’이란 용어를 쓴다. 

▲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위만조선에 대한 설명.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도적집단인 위만과 우거를 우리나라 사학계는 고조선과 기자조선을 계승한 위만조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거를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라 부르며 위만조선을 한껏 추켜세우고 있다. 한국 사학계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아래와 같이 홈피를 통해 위만조선을 찬양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관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이래가지고서야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인용)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중국 망명 집단과 다수의 토착집단의 결합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기에, 처음부터 고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는 중국 망명인 출신들 또한 고조선인으로서 완전히 토착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권을 빼앗긴 준왕은 뱃길로 서해안 일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교역과 중개를 통해 실력을 배양시켰고, 이렇게 하여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위만조선의 성장은 당시 북방의 강자인 흉노와 대치 국면에 놓여져 있던 한나라로 하여금 불안감을 야기시켰고, 결국 기원전 109년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50,000여명에 달하는 대군을 발동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였는데, 위만조선의 군사력은 한나라가 근 1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내분을 유도하여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강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인용 끝)

우리 사학계가 치켜세우는 위만조선은 3대에 걸쳐 겨우 약 90년 동안 존재했던 도둑집단일 뿐이다. 위만과 우거가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라의 체제나 제대로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교역으로 실력을 배양했고, 이렇게 축적된 군사력과 경제적 능력으로 임둔과 진번 같은 소국들을 복속시켜 점차 강국으로 부상하였다’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광고의 말을 믿어야할지....  이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 아니겠는가?

위와 같이 우리나라 식민사학계는 단군은 신화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직도 철저한 반도사관을 고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일본천황을 섬기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족사학계는 <한단고기>를 인용해 북부여가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 옳을까???

▲  아직도 단군을 신화라고 알리고 있으며, 위만조선을 찬양하고 심지어는 고조선의 건국년도인 B.C2333년까지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동북아역사재단에 정부는 수십원억을 지원하고 있다. 참으로 정신나간 정부 아닌가???

북부여 5세 고두막단군에 의한 쿠데타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고두막은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에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동명국을 세우고 즉위한다. 한나라가 4군을 세우고저 사방에서 침략함에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B.C 97년 10월 동명국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에게 사람을 보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여기서 옮겨 가시오”라 하니 고우루단제가 매우 곤란해 했다. 마침내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했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어 즉위하였는데  고두막한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B.C 87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해부루왕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忿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마침내 해부루왕은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대 왕력


위와 같이 동명국왕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쓰러뜨린 행위는 확실한 쿠데타라 하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고두막한은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해부루를 분릉으로 옮기고는 도성에 들어와 국호를 쓰는데, 왜 그는 종전에 쓰던 ‘동명국’을 버리고 ‘북부여’라 칭했을까?

그 이유는 북부여가 위대한 대제국 단군조선의 적통을 계승한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지 않았다면, 고두막한이 굳이 해부루를 쫓아내고 자기가 쓰던 국호(동명국)까지 버리면서까지 북부여란 국호 사용에 집착을 했겠는가?

북부여란 국호를 강제로 빼앗은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5세 단군으로 등극한다. <한단고기 북부여기>에는 고두막의 재위기간이 이원화 되어 있다. 재위(在位) 22년은 고두막한이 동명국의 왕으로 있었던 기간이고, 재제위(在帝位) 27년은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단제였던 기간이다.

강력했던 고두막단제가 붕어하자 태자인 고무서 단군이 등극한다. B.C 58년 고무서단군이 재위 2년 만에 붕어하면서 사위였던 고주몽더러 대통을 이으라고 유언하여 23세의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이 분이 바로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시는 고추모(주몽)이다.

이렇듯 분명히 북부여는 단군조선을 계승했고, 또한 도적 위만과 우거가 활동할 때 분명 어엿한 국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북부여는 고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연결된다. 역사가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북부여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북부여의 역사를 지워버린 식민사학자들은 단군을 신화로 만든 일제와 같은 종자가 아니겠는가!!!  


▲  주몽의 북부여 7대 단군으로의 즉위를 <한단고기>는 B.C 58년이라 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B.C 37년은 고구려로 국호를 바꾼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소서노는 6대 고무서 단군의 딸이 아니고 연타발의 딸로 보인다.  

<한단고기>에는 B.C 58년을 고구려의 건국년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청송 김성겸선생이 번역한 남당 박창화선생의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략>에는 고구려의 건국을 B.C 37년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두 종의 사서가 고구려의 건국년도를 서로 다르게 적었다고 해서 한 사서가 위서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고 본다.

필자는 B.C 58년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주몽이 B.C 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한 사서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제로 등극한 B.C 58년을 고구려의 건국으로 본 것이고, 한 사서는 북부여에서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 년도인 B.C 37년을 고구려의 건국년도로 보고 있는 차이일 뿐이다. 즉 견해의 차이일 뿐이다.

<한단고기 삼성기전>에 기록되어 있기를, “B.C 58년 봄 정월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주몽)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년호를 정하여 다물(多勿)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사용한 자체 년호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한단고기>는 고구려 황제들의 연호를 몇 개 언급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고주몽 성제(聖帝)가 사용한 ‘다물’이라는 년호이다. (고구려 황제들의 자체연호 사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종합해서 별도의 글을 올리기로 한다.)

참고로 <한단고기>의 고주몽 성제(聖帝)를 <삼국사기>에서는‘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고 있으며, <고구려 사초.략>에서는 추모대제(芻牟大帝)라 쓰며 년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자체 년호를 사용한 어엿한 황제국이었음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자체 년호를 사용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이란 왕명으로 위장하나, 이는 정식 황명(皇名)이 아니라 자체 년호였음이 남당 박창화 유고집인 <고구려 사초.략>에 의해 밝혀진다.

1세 추모대제는 ‘동명(東明)’이란 년호를, 2세 광명(光明)대제는 ‘유리광명(琉璃光明)’이란 년호를, 3세 대무신제는 ‘대무(大武)’라는 년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또는 아마 조선왕조?)이 왕명을 기막히게 작명해 고구려가 자체 년호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남당 유고집 <고구려사초.략> 청송 김성겸선생 번역

이처럼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에서 발생했던 쿠데타를 돌이켜 보면, 정변을 일으킨 자가 제위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던 것이 고구려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동부여의 건국과 쿠데타와 멸망

참고로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의 동생인 해부루는 고두막단군에 의해 B.C 86년 동쪽으로 옮겨와 가섭원(동)부여를 세워 39년간 통치한다. <한단고기>에는 이어 2세 금와(41년)--> 3세 대소(28년)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대소왕은 A.D 22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장수 괴유(怪由)에게 죽음을 당한다. 

대소의 죽음에 대한 이 기록은 <삼국사기>와도 내용과 년도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대소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동부여는 당시 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단고기>는 동부여의 멸망에 대해 자세한 언급이 없고, <삼국사기>는 동부여가 대소가 전사한 해와 같은 해 결국 항복한 것으로 적어 놓았으나 그 이후에도 부여 관련 기록이 몇 개 있어 그 기록이 이상해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광명대제 33년 (A.D 14년)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보위에 섰다. 즉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것으로 봐야 한다. 대불은 A.D 32년 전쟁 중에 전사하고 이어 여왕 고야가  통치하다, A.D 51년 고구려 대무신왕 때 평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해부루-->금와-->대소-->고야를 거치면서 4대 110년을 이어오다가 나라의 문이 닫혔으며, 중간에 대불이 19년간 보위를 훔친 적이 있다고 적어 놓았다. 대소왕의 동생은 “갈사(曷思)‘라는 나라를 세우나 3세 47년 만에 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갈사라는 나라는 동부여에서 갈라져 나간 지류(支流)로 봐야 한다.

<고구려사초.략>에 동부여 정벌에 대해 상세히 나오고 왕대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동부여의 가지인 갈사까지 언급하면서도, 북부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단고기>의 내용대로 “B.C 58년 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꿨다.”는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KBS 사극 '바람의 나라'에서 동부여의 3대 대소왕으로 분한 한진희
 
삼국사기에는 북부여를 한번 언급하고 있다. “유리명왕 29년(A.D 10년)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더불어 떼지어 싸워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빛이니 북부여(北夫餘)가 파멸될 징조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에는 같은 년도에 같은 기록이 있으면서 “오지인이 대소(동부여)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여라고 언급하면서 북부여 이야기는 전혀 없고 동부여 이야기만 적고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북부여가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 기록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기록은 사관(史官)들이 분명 북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그리고 북부여와 고구려가 전쟁을 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유리왕 29년의 <삼국사기> 기록은 누군가가 확실히 조작한 기록으로 보인다. 또는 부여(동부여)의 북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북부여라는 나라는 있었으나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다가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 즉 고구려와 북부여는 같은 나라로 서로 공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따라서 <한단고기>의 B.C 58년 고구려 건국 기록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다.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위서인가?

일제의 식민사학을 고수하는 강단사학계는 우리 민족의 성서인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까지 그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지 두고 보기로 한다. 본 글은 북부여와 관계된 글이기에 <한단고기>의 일부인 <북부여기>가 과연 위서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정본 한단고기에 포함되어 있는 북부여기 상, 하, 가섭원 부여기의 저자는 휴애거사 범세동장(休崖居士 范世東)선생으로 일명 범장(范樟)이라고도 한다. 범세동선생은 금성 범씨 대동보에 의하여 실존인물임이 증빙되었고, 대동보에 “북부여기 약초(略抄)”가 기록되어 있어 북부여기 실존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
휘(諱) 세동(世東), 호(號) 휴애(休崖) 또는 복애(伏崖), 자는 여명(汝明)이다. 선조가 금성인(錦城人)으로 본관은 금성이다.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 말기의 대학자이다. <한단고기>에 합본된 <북부여기 상, 하>와 <가섭원부여기>를 편찬하였고,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편집화해사전(編輯華海師 全)을 편찬하였다.

일찌기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義大夫)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광주직할시 광산구 덕림동에 묘소가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祠宇, 龍湖齊)가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국가만세에 마땅히 범세동 선생과 운곡 선생의 말을 쫓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당대의 대석학이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에 이르기를, 행촌(杏村) 이암선생(단군세기 저자)선생이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에 가서 태소암(太素庵)에 기거할 즈음에 한 거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소전(素佺)이었다. 그는 많은 기이한 옛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더불어 같이 신서(神書)를 얻게 되었는데 모두 옛 한단시대(桓檀時代)로부터 전수된 진결(眞訣)이다.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이여!
이렇듯 엄연한 실존 인물이었고, 범세동선생이 <북부여기>를 저술했다고 금성 범씨 대동보에 명확히 실려 있거늘 어떻게 <한단고기>를 함부로 위서라고  말하는가!!!  금성 범씨 대종회에 가서 이 사실을 확인해 보고, 만일 그 앞에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고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군세기>를 저술하신 이암선생과 <태백일사>를 편찬하신 이맥선생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고성 이씨 문중에 가서 <한단고기> 위서 운운하면 거기서도 몰매 맞아 죽을 것이다.  

▲  금성 범씨 4세인 범세동(장)선생의 기록. 이런 분이 가공의 인물일 수는 없다.
▲  금성 범씨 대동보에 실려 있는 <북부여기>에 관련 내용. 오른쪽에 퇴계 이황의 말이 실려 있다.
 
다음 주에 (3부) “고구려 때 쿠데타는 누가 어떻게 했나?”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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