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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의 운주(산동성)는 서신라의 땅

고구려의 후예인 제나라는 대륙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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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범
기사입력 2008-10-02

제나라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주신 J교수님은 아주 뜻깊은 일을 하셨지만 이 분 역시 반도사관을 벗어나지 못 하셨고 산동성 운주 지역을 당나라 땅으로 인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김웅원이 헌덕왕의 명을 받들어 무장병 3만을 이끌고 간 것을 치안 유지차 간 것이라고 현명하게 분석하셨지만, 역시 신라방 같은 신라인의 자치 기구를 위해서 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역시 식민사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주는 당나라 땅이 아닙니다.
만일 운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이런 기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 원년 조입니다.
애장왕이 즉위하고 좀 지나서인데 당나라에서 소성왕이 죽은 줄 모르고 소성왕의 책봉 교서를 써서 위단이라는 사람에게 신라에 전해주라고 했는데 이 위단이가 운주에 와서야 소성왕이 죽은 줄 알고 다시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만일 운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웃 나라의 왕이 죽은 일은 아주 중대한 일이라서 이런 소식을 들었을 경우엔 즉각 수도에 보고되었던 것이 통상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소성왕이 죽고 애장왕이 즉위하고 좀 지나서까지 소성왕의 죽음을 몰랐고 운주에 와서야 알았다는 것은 운주가 당나라 땅으로 볼 수 없는 증거라고 봅니다.

즉, 위단이 신라에 와서야 소성왕이 죽은 것을 알았다고 봐야 한다는 거죠. 수도에서조차 모르고 있던 소성왕의 죽음을 변방에 와서야 알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이로 봐서 이사도가 있던 제나라는 본래 신라 땅이고 그 지역에 와 있던 당나라 관리(ex. 양주절도사 조공+ 그 외 이정기 일가를 도왔던 당나라 번진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문무왕 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기 663년에 신라엔 당나라의 계림도독부란 것이 설치됩니다. 즉, 이는 신라가 당나라의 연방의 1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좀 기분이 나쁩니다만 사서상의 기록은 그렇습니다.

옛 소련을 봅시다.
소련 역시 한 나라라기 보다는 15개의 자치 공화국이 구성하고 있는 연방국입니다. 저 때의 상황이 소련식의 연방제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신라 땅에 온 당나라 관리들은 소련에서 치면 모스크바에서 각 자치 공화국에 파견한 장군들과 같다는 셈이죠.

그 이전 성덕왕 때를 보면 대진국(발해)이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니 당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고 또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군의 징집을 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과연 당나라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이런 걸까요?  그렇다면 신라는 왜 굳이 파병을 했을까요?
 
산동성 등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아, 난 동족을 칠 수 없소"하고 거절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는 역시 등주가 신라 땅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나라가 자신의 군사도 보내고 그 주변에 신라가 있으니까 원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다시 저 애장왕 때의 기록을 검토해봅시다.
만약 산동성 운주가 당나라 땅이라면 굳이 [삼국사기]에서 위단이 어느 지역에서 돌아갔다고 기록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오던 길이라고만 써도 될 것을 뭐하러 글자 수를 늘려서 수고롭게 한단 말입니까?

성덕왕, 애장왕, 헌덕왕 때의 기록을 볼 때 산동성 지역은 엄연한 신라 땅이라고 봅니다.
허나, 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가 워낙에 특이하다 보니까 해석하는 데서 여러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죠.
 
 
위 이론에 대한 사서의 기록 분석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가을 7월에 당나라 운주절도사(鄆(운)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헌종이 장차 이를 토벌하고자 조칙으로 양주절도사(楊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군사를 징발하였다. 왕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무장한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원문) 秋七月 唐鄆(운)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徵發我兵馬 王奉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勑(래)之

(지도로 풀어보면)
▲  순천은 북경일대, 운주는 산동성, 양주는 강소성


(1) 당나라 헌종이 수도 장안에서 양주절도사에게 명령을 한다
(2) 명을 받은 양주절도사 조공이 한반도로 와서 군사를 징발한다
(3) 이에 신라헌덕왕은 순천군 장군 김웅원에게 군사 3만을 준다
(4) 김원웅은 배를타고 반란을 일으킨 운주절도사 이사도를 평정하러 간다

→ 순천이 하북성 밀운으로 나온다(고지도상 '순'으로 표시)

(의문점)
(1) 운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한반도 순천에서 병사를 구하러 온다는게 말이되는가 ?
(2) 그 넓은 대륙의 당나라군사는 다 어디로 가고 한반도로 구하러 오는가 ?
(3) 군사 3만이 내 집 드나들듯이 황해를 건널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4) 신라가 그땅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원조 받은 것일 가능성은 ?
(5) 대륙내 지명중 순천이 있는지 찾아보자.  → 북경 일대가 '순천부'였다는 기록이 있군요.

한반도내 순천은 두군데 입니다. 함경남도 순천과 전라남도 순천입니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통일신라의 강역을 대동강 ~ 원산을 잇는 선이라 합니다. 함경남도 순천은 통일신라의 강역을 벗어나 발해땅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함경남도 순천이 합당하나 발해땅이므로 근세지명 전남 순천쪽으로 해석하는 분이 있나 봅니다.

어쨌거나 이 사건은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이지 한반도 사건이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  장안에서 명을 받은 양주절도사가 한반도 순천에 와서 군대를 징발할 수는 없다


고구려의 후예 이정기가 세운 '제'나라란?

(이사도는 이정기의 후손 이납의 아들) 산동성에 “제”나라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

'제'나라는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친 대제국이었다.
 
이정기에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은 782년 11월 산동성 운주에서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 운주가 치우천자의 릉이 있는 산동성 동평지역을 의미한다

이납(李納)은 슬하에 사고(師古), 사도(師道), 사현(師賢), 사지(師智)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819) 에 나오는 다음기사의 주인공은 이정기의 아들 이사도(李師道)를 말함이다

당나라 영향력 밖에 있는 고구려 후예 이사도를 신라장군 김원웅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동족을 멸하러 갔다는 서글픈 역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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