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광개토태왕 비문의 염수와 토곡은 어디?

4부작 광개토태왕의 강역으로 본 동북공정의 허구의 (3부)

가 -가 +

성훈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9-02-06

아래 글은 아래 4부작의 제 3부입니다.
(1부) 고구려의 초기 강역과 압록수는 어디?
(2부) 두 무덤(이제묘)이 밝혀준 고구려의 강역
(3부) 광개토태왕 비문의 염수와 토곡은 어디?
(4부) 덕흥리 고분으로 본 광개토태왕의 강역

 
비문으로 본 광개토태왕 때의 강역

3대 대무신제와 태조황제(대조대왕)를 거치면서 넓은 강역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는 위나라 관구검과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국세가 많이 위축된다. 그렇게 위축되었던 고구려의 강역을 다시 회복하고 오히려 더 강역을 넓히는 분이 바로 광개토태왕인 것이다.  

1.비려(碑麗)와 염수는 어디?

(1면 7행)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游觀土境, 田獵而還.
영락5년은 을미년으로 왕은 비려가 고구려인들을 돌려보내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부락 6~7백명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동래#성,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사냥준비를 시켰다. 순유와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보니(삭제된 듯) 학계에서는 외면하고 있으나, <고구려사초.략; 남당 박창화 찬술, 김성겸 번역>에는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비문의 비려(碑麗)나 사서의 비리(卑離)는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요서군 비여(肥如)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비여는 비려나 비리의 이두식 문자 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비여는 고죽성이 있는 영지와 같은 경내인 요서군에 있으며, 당취수(일명 마자수, 압록수), 유수(난하)와도 같은 경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준이 되는 고죽성이 있는 영지(令支)는 현 산서성 운성시 영제(永齊)시이다) 

<한서지리지> 辽西郡,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요서군에 있었다는 유수(濡水)는 난하의 고명이며, 중국의 하천 관련 고대 사서인 수경주(水經注)에도 유수는 분명 고죽성(노룡)과 같은 경내에 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비여 자체가 바로 노룡이었다는 중국 측 자료도 있다.  따라서 아래 수경주에서도 언급이 되는 노룡과 유수와 비여는 모두 요서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水经注》濡水:“玄水又西南径孤竹城北西入濡水。....沿玄水、濡水出卢龙塞) (“濡水从塞外来,东南过遼西令支县北……濡水又东南经卢龙塞塞道。自无终县东出,渡濡水,向林兰陉,东至清陉。卢龙之险,峻阪萦折,故有九峥之名矣。”在记述濡水所经地区山陵、原隰、城邑、关津的地理情况之后,作者又穷源竟委,插叙“濡水又南,黄洛水注之。水北出卢龙山, 

따라서 광개토태왕은 산서성 최남부인 운성시에 있는 고죽성(노룡) 근처에 있는 염수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즉 광개토태왕의 염지는 바로 산서성 운성시에 있는 운성염지라 할 것 이다. 운성염지의 길이는 35Km로 마치 바다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광개토태왕은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강토를 수복한 것이다. 이어 광개토태왕은 남진하여 계속 백제와 신라와 왜를 정벌한다.  
 
▲ 위축기 때 대대로 고유 강토였던 산서성 남부를 잃은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모두 수복하게 된다. 그 과정이 비여와 염수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2. 백제 아신왕의 항복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에 (고구려는) 왜가 바다를 건너오니 격파했고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해석이 여러 가지임) 

이후 광개토태왕은 백제의 아신왕에게 영위노객(永爲奴客)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백제를 복속시킨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6년 병신(396년) 상이 몸소수군을 이끌고 대방과 백제를 토벌하여 10 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서 돌아왔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이 <삼국사기>에는 거의 대부분이 삭제되어 있으나, <고구려사초.략>에는 기록이 되어 있다.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5년 을미년(395년) 광개토태왕이 친히 염수까지 이른 때가 2월이며, 백제의 진무가 쳐들어와 태왕께서 직접 기병 7천을 몰아 패수의 북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한 때가 8월이다. 불과 6개월 사이에 태왕의 친정이 두 번 있었다면 이 두 지역은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부산을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하였고,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吉蘭泰)라는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덩이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태왕의 발자취가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라고 <조선상고사>에 기고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단재선생의 염수비정을 삽입해 비교해 보면, 태왕께서 2월에 감숙성 서부에 있는 염수까지 친정(親征)했다가, 8월에 다시 남쪽에 있는 백제와 친히 전쟁을 치루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이 맞다면 단재선생의 이 염수비정은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파발마 혼자 갔다 온다면 6개월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겠으나, 대규모 전쟁 그것도 황제가 친정하는 군대가 2월에 감숙성 서부에서 전투를 치루고 8월에 고구려의 남쪽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산서성 남부에 있던 염수(운성염지)와 비여(노룡)는 원래 고구려의 강역이었으나, 고구려의 위축기에 잃어버린 영토였는데 광개토태왕이 이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는 계속 남쪽으로 진격해 백제를 복속시키고, 신라 땅(안휘성.절강성)에 들어온 왜를 추격하여 정벌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광개토태왕은 어디까지 갔을까? 

▲ 산서성 최남단 운성시에 있는 염지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는 모습. 운성염지는 황하에서 그리 멀지 않다.

3. 토곡(土谷)은 어디인가?
▲   티베트어와 한국어를 비교한 도표이다. 티베트어는 한국의 경상도 발음과 아주 유사하다.
광개토태왕 비문의 8년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莫斯羅城, 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8년 무술에 일부 군대를 변경의 백신(숙신?)토곡에 보내어 살피게 하여 인하여 다시 막사라성, 가태라성에서 남녀 3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조공하여 일을 논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토곡을 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토곡혼(吐谷渾) : 4세기 초 중국의 청해(菁海) 지방에 있던 나라 이름. 왕족은 선비(鮮卑)로 5호16국 시대부터 세력을 떨쳤으나 뒤에 북위ㆍ수ㆍ당의 토벌을 받아 663년에 도번(吐藩)에게 멸망 당하였음” 

토(土)자가 약간 다르나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토곡혼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미천대제 30년(329년) 나라 이름을 토곡혼으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토곡혼에 관한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난다. 즉 토곡혼과 고구려는 관련이 아주 많았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청해와 티베트 지역에서 나라를 이룬 선비족인 토곡은 과연 고구려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선 선비족은 단군의 후예로서 고구려와 같은 동이족이다. 그리고 배달국 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인 치우천왕의 뒤를 이어 15대 한웅으로 등극한 분이 치애특(蚩額特) 한웅으로 일명 티베트 한웅이라고도 한다. 

아마 이 때부터 동이족의 일부가 청해와 티베트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티베트어를 보면 우리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 티베트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는 “티베트와 한국은 형제국이다.”라며 한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중국 정부의 훼방으로 입국하지 못한 적이 있다.  

현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 고구려를 만주로 놓고 보면 청해(티베트 포함)지방에 있던 토곡을 살피게 했다는 이 기록은 허황된 기록으로 보이겠으나, 역사의 진실대로 고구려의 핵심 강역이 산서성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인다.  
 
▲  티베트와 청해 지방의 주 인종은 동이족으로 15대 치액특한웅 이후 대대로 거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4. 신라의 복속과 비문징실로 본 왜의 항복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特遣使還, 告以密計.
9년 기해에 백잔은 자기의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더불어 통호했다. 왕은 하평양을 순유했다. 그리고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국경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신라 사신을 특별히 돌려보내며 비밀계획을 말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住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10년 경자에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했다. 

이후 문구는 왜와 관련이 되어 있는 내용이라 일제가 조작하여 깨어진 글자와 결자가 많고 문구가 많이 조작되었다. 아래는 한단고기를 엮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광개토태왕 비를 보고 직접 글로 적어 전한 것이다. 이름하여 비문징실(碑文徵實)이라한다. 아래의 빨간 글자가 일제가 조작하거나 없애버린 글자이다. 

(第2面9行) 官兵 跡而越來攻來背 急追至任那 加羅從拔城 城卽歸服安 羅人戍兵拔 新羅城口城 倭滿倭潰城六
병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치니 성은 귀복 하였다. 아라인 수병이 "신라성"을 발하였다. 0성에 왜가 가득 있었으나 왜가 무너졌고 6성이 우리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第2面10行) 被我攻口滅 無遺倭遂擧 國降死者十 之八九盡臣 率來安羅人 戌兵滿假口 口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
왜가 드디어 거국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아라인 수병이 가00에 가득 차 있었다. 왜가 훼기탄, 탁순의 여러 적들과 더불어 감히 싸우고자 하여 00을 꾀하였으나 관병이 먼저 이들을 제압하여 바로 탁순을 빼앗았다.  

(第3面1行) 諸賊謀口口 官兵制先直 取卓淳而佐 軍由淡路島 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到竺 斯諸賊悉自潰
이어 좌군은 담로도를 경유하여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경유하여 무장에 이르고, 왕은 바로 축사에 도착하니, 여러 적들이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이를 군으로 삼았다. 

(第3面2行) 遂分爲郡安 羅人戌兵昔 新羅寐錦未 有身來口口 口國岡上廣 開土境好太 王口口新羅寐錦口口僕勾
아라인 수병. 예전에는 신라 매금(임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는 법이 없었는데,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때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스스로 와서 조공하고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위 비문징실 내용을 보면 왜 일제가 광개토태왕 비문을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일제의 조상인 왜가 식민지 조선의 조상인 광개토태왕에게 결국 항복하고 십중팔구는 죽었다는 기록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한 광개토태왕의 비문 조작은 이러한 이유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 일제의 비문 조작으로 비가 와 횟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장면. 일제는 왜 비문을 변조했을까? 그 해답은 비문징실이다.

그러나 현재 식민사학계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있는 <한단고기>와 <비문징실>같은 기록을 위서로 몰아붙이며 그 내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한단고기의 내용을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식민사학은 설 땅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의 자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계속 거짓 이론으로 국민들의 민족정신을 썩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학자의 양심도 없는 파렴치한들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강단사학자들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음 주에 제 4부 '덕흥리 고분으로 본 광개토태왕의 강역"이 연재됩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최신기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홈앱추가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Copyright ⓒ 2006 PlusKorea. All right reserved.
For more information, Contact Us or pluskorean@hanmail.net
전화 : 070-7524-3033 직통:010-8452-3040ll 팩스(FAX) : 02-6974-1453 || 정간물등록 서울 아02592 || 법인번호 215-87-29901
뉴스제보 기고 / 광고문의 / 기사정정요청 / E-mail : pluskorean@hanmail.net

기사에 언급된 취재원과 독자는 본지에 반론, 정정, 사후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요구처는 위 이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후원계좌 : 국민은행 093437-04-006792 (주)플러스코리아
플러스코리아타임즈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