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인가?

현 요녕성 요하 동쪽은 고구려 때의 요동이 아니다.

가 -가 +

성훈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9-03-31

본 글은 장문이라 아래와 같이 3부작으로 게재됩니다.

(1) 식민사학계의 잘못된 이론과 민족사학자의 이론
(2) 민족사학을 사칭하는 역사동호인들의 엉터리 이론
(3) 요동.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산서성 분하

이번에는 우리 고대사의 핵심 중의 하나인 요동과 요서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독자들께서는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이 기준 하나만이라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왜 중국과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그토록 혈안이 되었는지를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20만권의 사서를 불사르고 <조선사 35권>이라는 새로운 역사 이론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하는 신문기사
 
식민사학계의 요동.요서의 구분은 현 요녕성 요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구분하는 기준은 현 요녕성 요하(遼河)로, 요하 서쪽을 요서라 하고 요하 동쪽을 요동으로 한다고 학교에서 배워서 알고 있다.  이 이론은 중국과 일제의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는 우리나라 사학계의 정론(正論)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고구려는 현 요하 동쪽 즉 요동(만주)에 있던 나라로, 유리왕 때 도읍인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에 있고, 장수왕이 남진정책으로 대동강 평양에 있는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으로 교과서로부터 배운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정신을 갉아먹고 있는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의 기본 틀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요동과 요서의 구분을 현 요녕성 요하로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식민사학계의 이론을 충실히 반영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제와 이 나라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압록수는 현 압록강이며 서안평은 단동, 그 유명한 안시성과 요동성은 요하 근방, 비사성은 요녕성 대련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명 비정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과연 그런지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의 일부 기록을 보기로 하자.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漢書地理誌: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위의 기록과 현재의 지명을 비교하면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차이점을 간단히 아래와 같이 정리를 해보았다.
1. 위 기록에 따르면, 대요수나 마자수나 거의 같은 지역을 흐르는 강으로 보인다.
2. 마자수(압록수)가 현 압록강이 되면, 압록강 하구인 단동은 서안평이 되며 안시성과 평양성 국내성이 모두 압록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재의 안시성은 요하 근처로 압록강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현재의 국내성은 길림성 집안으로 압록강 북쪽이고, 현재의 평양성은 압록강과 역시 관련이 없는 대동강변에 있다. 결국 이는 무엇을 의미함인가? 한마디로 지명 비정이 잘못되어 있다. 즉 지명조작으로 역사왜곡이 되어있다는 뜻인 것이다.

현 식민사학계의 지리비정이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하면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신당서나 한서지리지는 이미 한족 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왜곡이 되어 있어 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 중요한 신당서나 한서지리지가 왜곡이 되었다고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어느 사서의 기록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일제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편찬한 <조선사 35권>의 역사만 믿는단 말인가? 모든 사서의 기록은 설사 가필과 왜곡이 되었더라도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곡이 된 부분이 있다면 무조건 전부를 부정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 왜곡된 것인지 찾아내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견해로는 분명 위 신당서 동이열전과 한서지리지의 기록은 절대 왜곡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압록수를 현 압록강으로 놓고 보면 위 기록이 잘못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압록수를 산서성 분하로 가져다 놓고 비정하면 희한하게도 위 기록은 100%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대의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이며, 바다는 현 황하이고, 서안평은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산서성 하진시, 안시성은 분하(압록수) 북쪽에 있는 화염산 남단, 평양성은 산서성 임분, 국내성은 산서성 평요나 태원으로 비정하면 위 기록은 100% 정확하게 들어맞게 된다.

▲ 고구려의 핵심강역은 요녕성과 한반도가 아닌 산서성이었다.
▲  고구려의 압록수는 현 산서성 분하, 바다는 현 황하, 서안평은 산서성 하진시, 안시성은 분하하류 북쪽, 평양성은 산서성 임분, 국내성은 산서성 평요로 비정하면 신당서의 기록과 100% 일치한다.
 
고 임승국교수가 본 요수는 현 하북성 난하

우리나라 사학계의 역사이론이 일제 때 만들어진 엉터리 식민사학을 기본 이론으로 하는 반도사관의 이론이다 보니, 나라를 사랑하는 많은 우국지사들이 우리의 자존심이며 민족정신을 쭈그러뜨린  식민사학을 성토하며 제각기 여러 이론을 발표했고 발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표될 것이다.

그 중에 우리는 가장 유명한 민족사학자로 <한단고기> 주해서를 낸 고 임승국교수를 기억하고 있다.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임교수는 국회에서 국사청문회를 하는 등 식민사학을 규탄하는데 앞장을 선 민족사학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임교수에게 불행했던 것은 시대를 조금 일찍 태어나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를 접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 임승국교수는 요동.요서를 구분하는 요수(遼水)를 현 요녕성 요하가 아닌 북경 동쪽 하북성 진황도시 근처의 난하(灤河)로 보았다. 그리고 근처 창려에 있는 갈석산을 고대 갈석산으로 인정해 <한단고기>의 주해를 달게 된다. 그 근본 이유는 <한단고기>에 언급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의 위치비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  민족사학자 고 임승국교수는 고대의 요수를 하북성 현 난하로 보아 요서 10성을 설명했다.
 
<한단고기>에 언급된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을 현 지명으로 보면 대부분이 북경과 동쪽 진황도시 사이에 있다. 그 중에 요동성(遼東城)이 있는데 창려에 있다고 했으므로, 그곳이 요동(遼東)이 되려면 요수를 현 난하로 비정해야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비정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당시로서는 요동.요서의 기준이 되는 요수를 요녕성 요하에서 빼내 서쪽 하북성으로 가져온 것만 해도 대단한 발상이었다. 

▲  한단고기에 기록된 요서 10성을 현재의 지명으로 그린 지도. 모두 북경 동쪽에 있는 하북성 난하 부근이고 요택과 택성을 황하구로 그렸다.  임승국교수의 요수=난하 이론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 비정도 중국의 지명조작을 전혀 모르고 현재의 지명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가 발달되지 않았다보니 임교수는 단지 사서의 기록에만 의거해 식민사학의 잘못을 지적하고 규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의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는 것보다 수십 배의 노력이 필요한 엄청난 분량의 작업이었다. 분명 현 사학계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옳았으나, 본인의 그러한 엄청난 노력과 불타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도 역사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지명으로 역사를 해석하다보니 뭔가 역사 흐름의 톱니바퀴가 잘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건 도저히 맞힐 수가 없는 퍼즐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지명이란 중국에서 명나라 때부터 지명 이동을 통해 이미 조작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동이족인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할 때는 왜곡이 많지 않았으나, 다시 한족의 민국(民國)이 결성되면서 지명조작을 통한 역사조작은 그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져 동북공정이란 역사왜곡 프로젝트까지 나온 것이다.

인터넷 없이 사서의 기록만으로 지명조작까지 추적해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100%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민족사학의 기둥이었던 고 임승국교수도 결국은 생전에 우리 역사의 진실을 못 밝히게 된 것이다. 사실 임승국교수 사후에 그 분 버금가는 민족사학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민족사학을 사칭하는 역사애호가들은 아직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고 있는 현실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최신기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홈앱추가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Copyright ⓒ 2006 PlusKorea. All right reserved.
For more information, Contact Us or pluskorean@hanmail.net
전화 : 070-7524-3033 직통:010-8452-3040ll 팩스(FAX) : 02-6974-1453 || 정간물등록 서울 아02592 || 법인번호 215-87-29901
뉴스제보 기고 / 광고문의 / 기사정정요청 / E-mail : pluskorean@hanmail.net

기사에 언급된 취재원과 독자는 본지에 반론, 정정, 사후보도를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요구처는 위 이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후원계좌 : 국민은행 093437-04-006792 (주)플러스코리아
플러스코리아타임즈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