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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항쟁 마지막 방송 김선옥씨, "고문 뒤 성폭행..내 삶은 5·18 때 멈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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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미 기자
기사입력 2018-05-08

▲ 광주 오월노래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갔지.."란 가사가 있다. 그들은 지금도 행방불명이다.     © 임진미 기자


 [플러스코리아-임진미 기자] 2014년, 34년 만에 밝혀진 목소리의 주인공 '5월 항쟁 마지막 새벽 방송' 김선옥씨가 2018년, 그는 계엄군이 고문한 뒤 성폭행 했다는 사실을 폭로해 전두환 신군부에 대해 또다른 파장을 예고 했다. 고문자를 상대로 한 성폭행은 5월 항쟁 후 전두환 계엄군들이 시민을 상대로 인면수심을 자행한 또 하나의 증거인 셈이다.

 

▲ 34년 만에 밝혀진 목소리의 주인공 '5월 항쟁 마지막 새벽 방송' 김선옥씨. 사진= 한겨레     © 임진미 기자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1980년 5월27일, 열흘간의 항쟁 마지막 날 새벽, 광주에 울려 퍼졌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지금껏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5월19~21일 항쟁 초기 길거리 방송의 주인공이었던 전옥주·차명숙씨는 검거돼 마지막날 방송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4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오월 마지막 새벽 방송의 주인공은 바로 김선옥 씨였다. 그런 그녀가 계엄군에 붙들려가 고문 당한 뒤 계엄군 수사관이었던 소령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38년만에 폭로했다.

 

한겨레는 <[단독] "고문 뒤 석방 전날 성폭행" .. 5월항쟁 38년만의 미투 "> 제목으로 광주 5월항쟁으로 붙잡혀 온 김선옥씨에게 고문을 가한 후 성폭행을 했다는 증언을 보도했다. 다음은 한겨레의 보도 전문.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항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김선옥씨가 지난 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38년 전의 상처를 이야기하고 있다.     © 사진=정대하 기자

 

딸에게도 그 일만은 숨기고 싶었다. 그래도 인터뷰를 반대하는 딸을 설득해야 했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글을 적어서 보여줬다. “나를 차에 태워서 밖으로 나가서 밥을 먹인 뒤, 나를 끌고 여관으로 갔어요. 나는 그때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스물세살 나를, 그 수사관이 짓밟고 나서….” 딸이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를 꼭 안았다.

 

5·18 민주유공자 김선옥(60)씨는 지난 4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나 전날 딸(37)과 나눈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얼마 전에 여검사가 미투를 해서 38년 만에 나도 용기를 냈다”며 그동안 묻어뒀던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그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던 그는 5월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아 도청에 들어갔다. 상황실에서 출입증, 유류보급증, 야간통행증, 무기회수 등의 업무와 안내 방송을 하는 역할을 했다.

 

계엄군이 광주 무력진압을 시작한 5월27일 새벽 3시. 그는 시민군 거점이던 옛 전남도청을 빠져나왔다. 잠시 몸을 피했다가 창평중에 교생실습을 나갔던 김씨는 그해 7월3일 학교에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게 옛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됐다. “가니까 ‘여자 대빵 데리고 왔구먼. 얼굴이 반반하네. 데모 안 하게 생긴 년이. 너 이년, 인자 무기징역이다’라고 하더라고요.”

 

폭행과 고문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막 들어가자마자 발로 지겨불고(짓누르고) 엄청나게 때리더라고요. 여기 이마가 폭 들어간 데가 있는데 그때 책상 모서리에 찧어서 그래요. 피가 철철 나면서 정신없이 맞았어요.”

 

폭행과 고문으로 점철된 조사가 끝날 무렵인 9월4일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그 수사관은 김씨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비빔밥 한 그릇을 사줬다. 오랜만에 본 햇살이 눈부셨던 날 김씨는 인근 여관으로 끌려가 대낮에 그 수사관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전에 죽도록 두들겨맞았던 일보다도 내가 저항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까지 비참했어요. 자존심과 말할 수 없는 수치감….” 9월5일까지 꼬박 65일 동안 구금됐던 그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 5월20일 13시, 계엄군은 애국가 방송을 흘려보낸 뒤 시민을 향해 무차별적인 총탄을 쐈다.     © 임진미 기자

 

 

김씨는 그 사건 이후로 삶이 산산조각 났다. 방황하면서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임신했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씨의 엄마는 충격을 받은 뒤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도 교직에서 쫓겨났다.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무도 만날 수가 없게 된 거예요.” 1981년 겨울 첫눈 오는 날 혼자 딸을 출산했다.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 1983년 중학교 음악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5·18의 ‘5’ 자도 꺼내지 않고 숨어 살았다. 오직 딸이 삶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암에 걸렸다. 2001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아마도 가슴에 묻어둔 슬픔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그때 처음으로 한 대학 후배한테 5·18 보상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배가 가져온 5·18 민주유공자 보상 신청서에 이렇게 적었다. “내 인생을 보상한다고요? 얼마를 주실 건데요? 무엇으로, 어떻게 내 인생을 보상하려고요? 뭘?” 보상금으로 2000만원을 받았다. 허망했다. 2010년 10월 딸이 결혼하고 난 뒤 이듬해 3월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처음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눈물을 쏟았다.

 

그에게 5·18은 현재형이다. “가끔 나 혼자 먼 데 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잠도 잘 못 자. 사람과의 관계도 잘 못하고. 남들은 결혼해서, 시가에서 남편하고 어쩌고저쩌고하는데 나는 5·18로 멈춰져버렸어요. 그 뒤로 딸 키우려고 아등바등 산 거밖에 없어. 할 이야기가 없어요.” 김씨는 “지금도 군인들이 나오는 영화는 잘 보지 못해요”라고 했다. “전두환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저놈 오래 살 것이다’라고 하면 딸이 막 웃어.”

김씨의 사연은 10일부터 광주시 서구 치평동 자유공원 안에서 5·18기념문화센터 주최로 열리는 ‘5·18영창특별전’에 공개된다. 23개의 광주 상흔을 담은 방 중 열번째 ‘진실의 방’에 ‘무너진 스물세살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그간의 삶을 드러내는 일에 동의했다. 이 방에 들어서면 한쪽 벽 전면에 꽃과 노랑나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비처럼 그가 받은 고통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 김씨는 “몇 달 전 미투 폭로를 보면서 그 나쁜 놈을 죽이고 싶었습니다”라며 멀리 하늘을 바라봤다.

▲ 시민을 저렇게 다루는 당시 계엄군. 인면수심, 금수만도 못한 행위였다.     © 임진미 기자

 

▲ 지나가는 시민 누구라도 붙잡히면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던 계엄군     © 임진미 기자

 

▲ 계엄군은 쓰러진 시민을 싣고 어디론가 가서 아무도 몰래 파묻어 행방불명 시켰다.     © 임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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