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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대운하인 '통제거'는 어디인가?

황하 남쪽의 통제거는 하남성 낙양 부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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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9-06-02

본 글은 아래와 같이 (2부)로 나뉘어 연재됩니다.
(1부) 수나라 대운하인 통제거는 어디인가?
(2부) 요택에 있었다는 영제거는 어디인가?
 

이명박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한반도대운하’라는 선거공약을 내걸어 당선되었다. 지금은 국민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시행되지 않고 있으나, 그래서 그런지 ‘대운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지가 않다. 게다가 수양제가 만들었다는‘수나라 대운하’가 우리에게는 역사적 사실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수나라 대운하’가 실로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동아일보가 소개한 “중국정부에서 발표한 수나라 대운하"
2006년 7월 22일 동아일보에 소개된 ‘수나라 대운하’를 보면, 중국 정부는 이 대운하는 수나라가 6년간에 거쳐 북경에서 시작하여 천진-->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을 거쳐 항주에 이르는 1,764km에 달하는 길이라고 발표했다. 가히 역사조작의 명수 중국다운 과장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당시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강역으로 수나라가 대운하를 건설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게다가 581년부터 618년까지 겨우 38년간 존재했던 짧은 역사의 수나라가 어떻게 이런 대운하를 건설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수나라는 통일이후 계속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이러한 대운하를 건설할 여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장비로도 막힌 구간인 881km(북부)를 수리하는데 4년이나 걸린다고 보도되었는데, 약 1,400여년 전 수나라가 6년 만에 이러한 대운하를 건설했다는 것은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수나라가 그런 대운하를 건설했다고 보도하는 중국의 뻔뻔함에 놀랄 뿐이다.

필자가 위와 같이 반론을 펴자 독자들은 과연 수나라 대운하는 실제로 어디에 위치했는지, 그리고 실제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대단히 궁금해 할 것이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수나라 때 운하는 두 종류가 건설되었다고 기록에 전한다. 하나는 황하 북쪽에 건설한 영제거(永濟渠)이고, 다른 하나는 황하 남쪽에 건설한 통제거(通濟渠)라는 운하이다. 그래서 중국은 동아일보가 발표한 지도에서 황하 북쪽의 막힌 구간을 영제거라 하며, 황하 남쪽의 뚫린 구간을 통제거라고 우기고 있다. 과연 그럴까?
 
 


 

 



▲   북경대 참고자료에 나와 있는 수나라 대운하인 영제거와 통제거.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

우선 사서의 기록을 보면, 통제거는 대업(수양제) 원년인 606년에 황하 남쪽에 건설하였고, 영제거는 대업 4년인 610년에 건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이 시기는 612년에 수나라가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기 직전이다. 당시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던 수나라가 과연 국력을 기울여 이러한 대운하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먼저 (1부)에서는 황하 남쪽에 건설했다는 통제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    중국 인터넷에서 찾은 통제거를 설명한 지도. 통제거가 황하와 회수 상류를 연결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나마 역사의 기록과 비슷하게 되어있다.  

 
황하 남쪽에 건설했다는 통제거는 어디인가?

통제거에 대한 수서 양제기(隋书炀帝纪)의 기록을 보면,
대업 원년 통제거를 개통한다. 황하 남쪽 회수 북쪽의 여러 군민 백여만명을 동원해 통제거를 개통한다. 서원에서부터 곡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 황하에 다다르고, 판저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 회수에 이르게 한다. (大业元年开通济渠,“发河南淮北诸郡民前后百余万开通济渠。自西苑引谷洛水达于河,自板渚引河达于淮”)

우리는 이 기록으로는 통제거가 2단계로 나뉘어 건설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단계 통제거는 서원에서 황하까지이고, 2단계 통제거는 판저에서 회수까지 임을 알 수 있다. 1단계 통제거의 시작점인 서원은 낙양 서쪽의 수황제궁이 있는 곳이고, 곡수를 <중국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낙수는 서쪽인 섬서성에서 나와 낙양을 거쳐 이하(伊河)와 합쳐져 황하로 흘러가는 강이다.

谷水 : 出河南陕县东境东崤山谷阳谷,东流经渑池,合渑水,又东合涧水为涧河,至洛阳西南入洛,按谷水为涧河上游,故涧河下游亦可称谷水,《水经注》云,涧水北流注谷,即指此,周灵王时,谷洛閸,毁王宫,即谓涧洛二河漫溢也,谷涧里三水久混,据周书涧东之文,其水应在王城之西,南流入洛,即《水经注》所谓死谷,涧水既合于谷,不知保时又东合于里,涧水既合于谷,不知保进又东合于里,禹贡锥指谓周景王雍谷入里,亦无确据,《水经注》自千金渠以东,乃里水经流,非涧谷故道也,今清会典图以陕县流入渑池者为谷水,涧水发源渑池东北白石山,至东南合流,其下通谓之涧水,下流至洛阳西南入洛,不通里水,又一变而与周书合矣。 

복잡하나 간단히 설명하자면 “곡수는 하남성 협현 동쪽 경계에서 나와, 민지(澠池)를 거쳐 민수와 합쳐지고, 간수와 합쳐져 간하(澗河)가 되어, 낙양 서남에서 낙수로 들어가는 강이다. 옛날에 간하 하류를 역시 곡수라 했다.” 협현은 지금의 낙녕현으로 낙양시의 서쪽에 있는 현으로 곡수는 낙수의 서쪽 지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낙수는 동쪽으로 흘러 결국 황하로 들어가는 강인데 왜 굳이 통제거라는 운하를 만들어 황하와 연결하려 했을까? 곡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 황하와 연결하려면 지정학적으로 통제거는 낙수 북쪽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지형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필자는 통제거는 낙양시 북쪽에 있는 맹진시를 관통하기 위한 인공하천으로 보는 것이다. 
 
▲   하남성 낙양 부근의 물길도. 곡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 황하까지 연결하는 1차 통제거는 낙수 북쪽일 수 밖에 없다. 다른 방향으로는 물길상 설명이 안된다. 간하와 낙하가 낙양에서 합쳐져 흐르다 이하와 합쳐지기 전의 강을 곡낙수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2단계 통제거는 실제 만들어 졌을까?

2단계 통제거의 시작점인 판저(板渚)를 <중국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판저는 하남 사수현 동북 20리에 있다. (板渚 : 在河南汜水县东北二十里,《水经注》“河水东迳板城北,有津,谓之板城渚口,”隋炀帝开通济渠,自板渚引河入汴)“고 나온다. 사수현은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서쪽 황하변에 있는 현이다. 

이 부근에 있는 판저라는 곳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 변수(汴水)와 연결하는 물길이 2단계 통제거인 것이다. 변수(汴水)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찾아보면 “即汴河。发源于荥阳大周山洛口,经中牟北五里的官渡,从“利泽水门”和“大通水门”流入里城,横贯今之后河街、州桥街、袁宅街、胭脂河街一带,折而东南经“上善水门”流出外城。过陈留、杞县,与泗水、淮河汇集。(영양시 대주산에서 발원하여 중모현 북을 지나 밖으로 나가서는 기현, 사수를 거쳐 회하로 들어간다.)

필자는 이 변하를 지금의 가노하의 일부나 지류로 보고 있다. 워낙 작은 지류인지 지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우나,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영양시와 중모현 북을 지나는 강은 가노하(賈魯河) 밖에 없다. 가노하는 황하 부근에서 발원하여 하남성을 가로질러 가다 주구(周口)시에서 영하와 합쳐져 영하란 이름으로 회하 상류로 들어가는 강이다.

▲   1, 2차 통제거와 관련된 하남성 물줄기를 녹색으로 표시했다. 전체가 통제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가노하 전체라고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가노하와 영하(潁河) 전체를 통제거로 보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분명한 것은 가노하와 영하는 인공 하천이 아니라 자연 하천이므로 통제거가 절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2단계 통제거는 황하변 사수현과 가노하를 연결하는 짧은 물길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지명대사전>이 이와 같이 설명함에도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교육용 지도 및 군사지도까지 왜곡하여 통제거가 하남에서 시작하여 회수까지 연결된다 하면서, 심지어는 자연하천까지 인공수로인 수나라 대운하에 포함시켜 엄청나게 부풀리기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해 망하는데,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대운하라는 공사를 하느라고 민심이 이반하여 망했다는 논리를 내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수나라가 운하를 만들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수나라가 운하를 만든 이유는 고구려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용 군수물자를 산서성 남부에 있는 고구려까지 육로로 수송하려면, 바다와도 같은 요수(황하)를 지나고 또 200리나 이어지는 습지대인 요택을 지나야 한다.

이러한 전쟁용 군수물자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수양제는 운하가 필요했던 것이다. 참고로 당태종은 수양제가 보급로를 고구려에게 빼앗겨 전쟁에 패했다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낙양에서 고구려까지 보급로를 만드는 대신 아예 가축을 가지고 다녔다.

수나라의 전후 사정으로 볼 때 1차 통제거는 낙양 북쪽에 있는 맹진현을 관통하여 황하에 도달하기 위한 최단코스의 운하로 보아야 한다. 통제거 없이 그냥 배가 낙수를 통해 황하로 들어가려면 먼 거리를 돌아야 하고, 황하 북쪽에 있는 습지대인 요택(심수 하류 좌.우)을 피하기 위해서는 황하를 역류해서 올라가야 하는 작전상의 어려움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    검은 선으로 표시한 것이 1, 2차 통제거 예상 위치. 정확한 위치는 아니나 그 일대로 본다.
▲    2차 통제거는 판저에서 가노하와 연결하는 물길. 가노하는 회수까지 연결된다.
 
그래서 필자는 고구려와의 전쟁과 별로 상관없는 운하인 판저에서 회수에 도달한다는 2차 통제거는 역사 왜곡을 위한 후대의 첨필이던가 아니면 실제로 만들었다면 백제와 신라로 가기 위한 운하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2차 통제거 역시 실제 있었다 하더라도 길이가 긴 대운하가 아니라 황하와 가노하의 발원지를 연결하는 짧은 물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제거는 현재 중국이 조작한 것과 같이 800여 키로에 달하는 긴 운하가 아니라 불과 몇 십km에 불과한 짧은 물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제거는 산동성에 있는 황하 하류와 절강성의 회수 하류를 통하게 하는 대운하가 아니라, 하남성 낙양 북쪽에 있는 맹진현을 관통하는 자그마한 인공 하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나라 식민사학계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으며, 재야의 엉터리 역사싸이트들은 중국에서 조작한 군사지도만 보고 통제거가 내몽고 황하변에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려면 이러한 식민사학계와 엉터리 주장을 하는 역사동호인부터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는 날이 와야 진정한 역사 광복이 되어 민족정기가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 모 역사싸이트에 있는 중국군사지도 상의 영제거와 통제거. 이런 엉터리 자료를 믿으면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중국의 모든 지도는 역사왜곡을 위해 이미 지명조작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나마 <중국지명대사전>으로 추적하면 역사왜곡의 흔적이 보인다. 
▲  하남성 낙양 근처에 있던 통제거는 중국에 의해 동쪽으로 황하와 회하의 하류로 옮겨져 역사왜곡이 되었고, 엉터리 역사싸이트에 의해 내몽고쪽으로 왜곡이 된다. 우리 스스로 역사왜곡을 해서야 동북공정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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