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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기29]비전향장기수 김동기 선생 자택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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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기사입력 2015-06-29


새 살은 상처에서만 돋는 법

바쁘고 분주한 방북 여정에서도 무엇보다 흐뭇한 일은 남에서 살다가 몇 십 년 만에 자신들의 조국과 고향산천으로 되돌아 온 비전향 장기수선생들을 만나고 오는 일이다. 북에서는 지금까지 이들 장기수들을 가리켜 ‘신념과 의지의 강자’,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참된 혁명가’, ‘불사조’, ‘통일의 불새 ’등으로 호칭하며 극진하게 환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정치적인 것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생활적인 면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었다. 

2014년 4월, 우리는 안내원을 따라 비전향장기수로서 문학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김동기 선생을 만나려고 그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그의 자택은 평양역 근처 고려호텔이 보이는 해방산 거리 인근에 있는 고층 아파트였는데 위치는 평양시 중구역 동흥동 1호동이었다. 

40여평부터 시작해 75평까지 다양한 평수를 갖추고 있다는 이 고급 아파트에는 이날 마침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동 아파트에 사는 최태국 선생과 최하종 선생도 같이 놀러와서 우리일행을 맞이하며 함께 해주었다. 옛말에 ‘새 살은 상처에서만 돋는 법’이라더니 그동안 내가 만났던 장기수들의 삶은 그야말로 180도 달라졌고 새로워졌다. 남쪽에 거주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삶의 질을 누리고 있었으며 그런 환경을 뛰어넘어 삶의 의미와 가치까지 완전히 달라진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살펴보았다. 








작가로 활동하는 김동기 선생댁을 방문하다

김동기 선생의 자택을 방문할 당시 6.15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북송된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 가운데 이미 절반이 넘는 33명이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들은 30명뿐이었다. 나와 일행은 올해 83세인 김동기 선생의 아파트를 찾아가 그의 최근 근황과 살림살이 모습, 그리고 김동기 선생의 동지들인 최태국 선생(80), 최하종 선생(88)도 함께 초청해 자리를 같이하며 북에서의 생활상에 관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나는 이공순 선생과 이재룡 선생을 비롯해 생존해 있는 장기수 선생들과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들을 방북 일정중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평양 고려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아파트는 내부와 외부가 모두 비교적 깔끔하고 현대적인 이미지였다. 나와 일행이 아파트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현관에서 서성대며 기다리던 세분의 장기수 선생들과 그들을 보살펴주는 담당자등이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김동기 선생댁에 올라가자 집안에는 우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 김동기 선생의 처남의 딸이라고 하는 김지혜 동무가 분주한 손놀림으로 다과와 음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북송되던 해인 2000년 9월 당시, 36세였던 유일한 혈육인 아들 김 철씨가 부인과 함께 김동기 선생 가까이 살고 있었으며 손자를 한명 두고 있었다. 아들 내외는 직장에 출근을 했고 손자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평양의과대학 출신 의사라고 하는 처남의 딸은 김동기 선생의 자택을 자주 찾아와 물심양면으로 살림살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건강 점검과 살림수발을 들어주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살림살이 편의시설과 장식품들은 고급스럽게 갖춰져

김동기 선생이 거주하는 이 아파트는 내부가 40평대 면적의 공간으로 보였다. 침실과 서재로 사용하는 방외에 모두 4개의 방들을 갖추고 있었으며 거실을 비롯해 화장실겸 샤워실, 주방, 창고(다용도실)등 모든 내부 구조나 시설들이 4식구가 살기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손자의 공부방과 아들 내외가 기거하는 안방을 비롯해 각자의 삶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 구조였다. 또한 에어컨과 온풍기 시설은 물론 액정 텔레비전을 비롯한 갖자기 전자제품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주방에 들어가니 식탁위에는 닭알을 형상화한 멋진 조명아래 우리 일행을 접대할 맥주 안주와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촐한 가족들이 살기에는 넓고 한적해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집안 곳곳에는 각종 그림, 족자, 도자기, 공예품을 비롯해 김동기 선생이 늦은 나이에 공부해서 받은 박사학위증, 북송되던 해인 2000년 9월 4일에 비전향장기수 63명 전원에게 수여된 ‘조국통일상’을 비롯해 각종 상장과 상패등이 장식되어있었으며 작가로서 자신이 집필한 대여섯권의 작품집도 진열장에 보관되어있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재혼을 마다하다

김동기 선생은 1999년 2월 광주교도소에서 34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이후 그 이듬해 9월,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살아있을 줄 알았던 그의 부인 김은옥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부인이 살아있었더라면 북송 당시 64세에 불과한 젊은 나이였다. 

아내를 잃은 그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재혼하기를 마다하고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남파되어 작전을 수행할 때 성공하지 못했던 실패한 공작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받아주고 끝까지 혜택을 베풀어준 조국과 최고지도자에게 평생 은혜를 갚기 위함이라고 했다. 

같은 장기수 동지들 중 김석형 선생은 86살에도 뒤늦은 새 장가를 갔고, 두 달짜리 갓난 핏덩이를 두고 떠났던 조창손 선생은 40년 만에 아내는 물론 아들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동기 선생은 동료들이 부럽지도 않은가보다 생각했다.

김동기 선생은 1932년 10월 19일 함경남도 단천 출생으로 34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북송되었고, 남에서 체포되기 전에는 북에서 평양상업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북조선 상업성에서 경제부문 관리로 근무했다고 한다. 34년간의 감옥생활 중에는 남쪽에 영치금을 넣어줄 일가친척이나 가족들이 전혀 없어 다른 장기수들보다 더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칫솔 하나를 가지고도 몇 년씩 사용했으며 다른 수감자가 입고 남은 내복을 주워서 입기도 했다고 한다. 







늦깎이 박사학위, 작가동맹회원으로 왕성한 집필활동

김동기 선생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03년에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국가학위학직위원회에 논문을 제출하여 사회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북에서는 박사학위를 수여받는 것이 매우 엄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각보다 학구열이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또한 김동기선생은 북송되기 한 달전인 2000년 8월 1일에는 남쪽의 아침이슬 출판사를 통해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는 수기를 출판했으며 송환 후에는 물 만난 고기처럼 본격적으로 조선작가동맹 소속의 정식 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태양 가까이에서’를 출판했고 2003년에는 김용수, 최태국, 손성모 등 다른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함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나의 신념이고 의지였다’를 연달아 출판했다. 그는 계속해서 ‘생이란 무엇인가(2004년)’, ‘삶의 노래(2006년)’, ‘조국의 품에 안겨(2010년)’, ‘저녁 노을은 붉다(문예출판사)’ 등을 출판하는 왕성한 필력을 보여주었다. 원래 문학과는 아무 인연이 없다던 그가 집필활동을 하게 된 동기에 관해 나는 사뭇 궁금증이 발동하여 연달아 질문을 던지니 그의 명쾌한 답변이 시작됐다. 

“남조선의 좁은 철창속 갖혀서 수십년을 살아가면서도 통일의 신념과 지조를 지켜며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동지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 책을 읽거나 글을 쓰시는걸 좋아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글을 쓰거나 책을 출판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동지들의 강철같은 의지와 신념을 내 눈으로 목격을 했으니 이 사실을 꼭 우리나라의 력사에 꼭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남한에서는 책을 출판하시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아, 그게 사연이 있습니다. 내가 쓴 글들이 민가협을 통해 외부로 보내졌고 마침 그 글들이 민가협을 후원하고 있던 미국 워싱톤장로교회측에서 원고 그대로 책으로 출판을 해줘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빛을 그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탄생된 것입니다.”

나는 내친김에 그의 문학 세계나 인생철학 등에 관해서도 질문을 했다. 







민족적 사회주의자와 문학세계를 말하다

김동기 선생은 한 평도 안 되는 0.75평 독방 감옥에 34년간 수감되었다가 1999년 2월 25일에 출소했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광주 무등산 공원에서 쓰레기를 줍는 초라한 공공 근로자로 취업해서 생활하다가 북송됐다고 한다. 

나는 그가 출소 직후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정열이 불타는 사회주의자다”라고 말한 것이 뚜렷이 기억나서 그의 말과 몸짓, 행동등을 유심히 지켜보았으나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 이웃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수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 속에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전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하거나 남다른 별종은 아닌듯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그저 인간을 향한 애틋함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는 평범한 휴머니스트의 모습과 함께 확고한 사회주의자의 모습도 보이는듯했다. 그를 평생 이끌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사상과 이념을 자신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육화시켰다고나할까? 

아무튼 나는 김동기 선생으로부터 그가 집필한 자신의 작품들을 손에 받아들고 잽싸게 속독 아닌 속독법으로 책의 내용들을 빠른 시간에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그가 집필한 여러권의 책속에서 그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킬 수밖에 없는가를 희미하게나마 발견하게 됐다.

“내가 야만적인 고문과 협박, 그리고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는 회유책에도 지조를 지킬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수령님의 인간적인 매력과 품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사회주의 우월성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쪽 언론들은 나와 동지들이 전향하지 않았던 이유를 북에 두고 온 처자식들의 신변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비방했는데 그때 나는 가장 분노했고 경멸스러웠습니다.”

-“그럼 김주석님을 실제로 뵌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평소 공식 장소에서도 서너번을 가까이에서 뵌 적이 있었고 실제로 한 번을 만나 뵌적이 있었지요.”

나는 그가 한 평도 안되는 골방에서 수십년간 갖혀 있으면서도 그토록 일편단심 변절되지 않는 그 비결이 무엇인지 의아해지며 더욱 궁금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입니다. 남쪽에 정보부 요원들이 나를 전향시키려고 공작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 편으로는 치가 떨립니다. 그러나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했지만, 나는 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지요. 누차 말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기초는 인간적인 정서이기 때문에 내가 지켜온 인간됨이라는 것은 사회주의적 가치와 지향성만이 보편적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기초로해서 제 생각을 작품속에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을 스치듯 읽었지만 그의 글과 언행은 매우 공통된 부분이 많았음을 금새 알 수 있었다. 그의 신념은 마치 종교인들의 신앙이 무색하리만치 완고하고 강력했다. 그의 신념은 인격 그 자체였고 그가 살아 온 삶의 이유처럼 보여졌다. 그는 인간애를 기초로 한 민족적 사회주의 문학가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을 듯 싶었다. 

그리고 그는 현실보다 신념이 앞서고 있는 듯 보였으며 그런 그를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출옥 후 남쪽에서 잠시 살았을 때의 모습은 마치 사이즈가 맞지 않은 신발을 신은 듯 어색하고 낯설었다면 북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딱 맞은 신발을 신고 마음껏 달리고 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여유로워 보였다. 



남쪽에 방문하시면 안부좀 전해주세요

이날은 우리 일행을 위해 두 분의 장기수 선생들이 합류하여 자리에 함께했다. 최태국 선생은 1935년 평북 삭주 출생으로 34년 옥살이를 하였고, 최하종 선생은 1927년 3월 21일 함북 성진 출생으로 37년 옥살이를 하다가 2000년 9월에 북송된 분이다. 

어느덧 세 명의 장기수 선생들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되자 주방에서는 준비된 과일과 음료, 다과들이 연달아 나왔다. 특히 북어포가 접시에 담겨 나왔는데 어찌나 내 입맛에 맛있던지 나는 대화 도중에 게눈 감추듯 혼자서 다 먹어치우다시피했다. 김지혜 동무가 눈치를 채고 북어포가 접시에서 동이나기가 무섭게 연속으로 공급해주는 바람에 나는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북어를 어떤 방식으로 건조했는지는 몰라도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하고 담백한 맛이었다.

음료와 다과를 들며 선생들과 대화를 나누니 시간가는 줄 모른다. 김영삼 정부 때 분단 이후 최초로 북송된 이인모 선생 이후,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으로 첫 수혜자가 된 비전향장기수들은 출옥은 했지만 많은 애로 사항이 뒤따르고 있었다. 

특별히 사회에 적응하거나 고령에 직장에 취직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세 명의 장기수들은 사랑의 빚을 진 고마운 사람들을 일일이 떠올리며 나에게 안부를 전해주었다. 서울의 아무개, 광주와 대전의 아무개 미국의 아무개 등등 한 사람씩 이름을 떠올리며 헤아릴 때마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당시 전국에 산재해있던 교도소에서 출옥한 대부분의 장기수들은 각 지역에 있던 나눔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회단체와 종교기관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최태국 선생은 대전에 있는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나눔의집 원장을 하던 유낙준 신부(현재 대전교구장, 주교)의 신세를 너무 많이 졌다며 안부가 궁금하다고 말해주었다. 남쪽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꼭 신부님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유 신부는 98년부터 비전향장기수의 쉼터인 ‘형제의 집’을 개소해서 최태국 선생을 비롯한 여러 장기수들을 극진하게 돌봤다고 한다. 나의 눈에는 이 세 명의 장기수들은 잔정많고 인심 좋은 푸근한 이웃집 할아버지들의 모습으로 다가 올 뿐이었다.







친한 벗들은 최태국 선생과 최하중 선생

최태국 선생과 최하중 선생도 가슴속에 품어둔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많은듯했다. 최태국(최수일) 선생은 감옥생활 35년만에 출옥하였고 6.15시대를 맞아 2000년 9월에 꿈에도 그리워하던 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서른 살이었고, 내 처는 당시 26살이었고 임신 5개월이었습니다. ‘살아만 있다면 업어 주고 안아주고 고생은 안시켜주리라’고 굳게 다짐하며 판문점을 넘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많은 여성 동무들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나는 멀리서도 서성거리는 내 처를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세월이 흘렀는데도 정말 알아볼 수 있으셨나요?”

=“그럼요. 그런데 내 처, ‘박용녀’는 세월이 많이 흐르고 환갑이 넘은 나이(61세)가 되어서 그런지 나를 도무지 알아 보지 못하더군요. 아무튼 당시 뱃속에 있던 내 딸과 내 처와 우리 셋은 서로 끌어 안고 부둥켜안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최태국 선생은 차분한 어조였지만 아직도 흥분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며 당시의 순간을 떠올렸다. 부녀가 상봉하는 날 평양의 호텔에 도착해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자신의 딸이 이미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매우 놀라며 기쁨에 겨워했다고 했다. 당시 평양호텔에 마중을 나왔던 9살, 10살이던 손주들이 지금은 벌써 모두 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또한 머지않아 구순을 바라보는 최하종 선생은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었지만 매우 진지하고 근엄한 스타일의 용모를 지닌 분이었다. 안타깝게도 부인과 상봉은 했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사별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을 졸업한 엘리트출신인 부인은 북송 이후 상봉의 기쁨으로 벅찼지만 함께 함께 산지 7년만인 2007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현재 아들은 내각에서 일하고, 딸은 체육성에서 일한다고 한다. 35년의 옥중생활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뇌혈증 후유증으로 고생하였고, 한쪽 눈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고 한다.

“내가 나의 조국과 고향 땅에 왔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이미 죽을 몸이었습니다.”

- “제가 알기로는 선생께서는 서예의 대가(大家)라고 들었습니다”. 

= “뭐, 대가는 아닙니다. 전국을 다니면서 제 작품을 순회 전시하기도 하고 전국 서예전에 빠짐없이 출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 “건강하지도 않으신 상태에서도 그처럼 정열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신다니 대단하십니다.”

= “감옥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니 나는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서 우리 조국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더 보답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김동기 선생을 비롯한 최태국, 최하중 선생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과 감동적인 사연들을 듣다보니 과연 이 세상 그 어디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찾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장기수 선생들의 입장에서 체험한 주관적인 증언이지만 이들이 겪어 온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사연들 중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 많아서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그런 고통과 아픔을 극복해 내면서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지조와 신념을 지니고 살아왔다. 나와 입장을 바꿔놓는다면 나는 과연 저런 상황에서 저들처럼 저렇게 신념과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까라는 반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2015년 6월 현재, 비전향장기수는 25명만 생존

내가 김동기 선생의 아파트를 다녀갈 당시만해도 63분의 장기수 송환자 중에 절반 이상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30명만 남았으나 그 이후에도 내가 미국으로 돌아와 체류하는 동안에 연속적으로 부음이 들려왔다. 

남한에 살았을 때 소위 ‘한총련 할아버지’로 불리던 윤희보 선생이 지난 2015년 3월 18일 향년 98세로 운명했고, 지난 2015년 4월 4일에는 38년간 옥살이를 했던 방재순 선생이 향년 9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2015년 1월 4일에는 신인수 선생이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백수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최고령 3인을 비롯해 지난해(2014년도)에도 두 명의 장기수가 추가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서 북으로 1차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 63명 가운데 생존해 있는 분들은 2015년 6월 현재 모두 25명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현재 남쪽에 남아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담당하는 대한민국 법무부측에서는 1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34명가량이 되는데 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들이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고향산천에 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남북관계가 원할했던 6.15 시대에 이미 1차 송환(63명)에 이어 2차 송환을 하기로 남북이 정식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5.24대북조치를 내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송환 논의 자체가 중단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2차 송환 희망자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 포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당연히 7.27 정전협정과 더불어서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으로 송환 되어야 원칙이었으나 이승만 정권이 특별 재판을 통해 이들을 형무소에 구금하며 송환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는 명백히 전쟁포로에 대한 국제법 위반이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는 아무런 조건없이 이들을 조속히 송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게도 1차 송환 비전향 장기수들이 벌써 3분의 2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이들 2차 송환대상자들도 고령인 분들이 대다수이다. 아직도 2차 송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가족과 생이별의 아픔을 느껴야 하는 비전향 장기수들도 점점 한 두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으니 하루빨리 2차 송환이 성사되어야만 하며 이들은 계속 붙잡아두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김동기 선생의 자택을 떠나면서 이번 방문이 마치 목회자가 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위로의 말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목회 역사상 가장 먼 길을 달려온 심방이 아닌가 싶다. 특히 이들이 감옥에서 생활 할 때 종종 찾아와 전도를 했던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들과 전향을 회유하기 위해 투입된 목사님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듣게 되었다. 이들은 내가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기도해야 드려야 할 분들이었다. (끝)

최재영 목사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The Light of Glory Church 담임목사 역임
 소셜무브먼트그룹 NK VISION 2020 설립 & 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 동북아종교위원회위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미국 풀러신학교 대학원 선교목회학 박사
 미주장신대학교 대학원 구약학 석사
 미주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교육학
 안양대학교 신학과 同 신학대학원
 
[원본기사:NK투데이(http://www.nktoday.kr/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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