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학회31차포럼, 조홍근 " '세계문자의 기원은 한배달조선 우리 글" 김일미 기자 2017.07.24 15:09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 김일미 기자] 위대하고 찬란했던 대조선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대조선역사학회 제31차포럼이 지난 22일 오후 2시 영등포 구국실천연합 강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특별강의는 본지 역사전문위원이자 한문화사업총단대표 조홍근교수의 '세계문자의 기원은 한배달조선 우리 글'과  대조선역사학회 힉술위원 김순진교수의 '우리겨레 시원, 개천절의 진실!' 이라는 주제로 3시간 동안 강연했다.

 

▲ '세계문자의 기원은 한배달조선 우리 글' 특강하는 조홍근 교수     © 김일미 기자

 

다음은 조흥근교수의 특강 2부 영상과 핵심요약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글이라는 말은 한자로 契인데, 이 글자는 원래 '긁다, 썰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로서 순수한 우리말로서 '글, 설'로 읽힌다. 글은 또 혀짧은 발음으로 '긔'로 발음 나면서 '거' 또는 '계'로도 소리나게 되는데, 역사상 존재했던 '거란'을 나타내는 글자인 契丹은 '거란, 글단'으로 읽으며, 한편으로는 '긔단'의 변음인 '키탄'으로 소리나게 되고 이것이 나중에 '키타이'가 되고 결국에는 지금의 홍콩의 항공사 이름인 '케세이'(퍼시픽)로 소리가 변하여 남게 되었다.

 

우리 역사 속 마고시대에 이미 흑피옥이라는 유물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상형문자이면서 표음문자 형태를 지니고 있다. 대표적으로 '오리'를 나타낸 글자가 있다. 영락없이 오리를 특징적으로 나타낸 상형문자이면서 '오리'라고 읽히는 글자이다.

 

배달나라 시대에 이미 녹서, 용서, 우서, 화서, 과두문, 조족문 등의 여러 서체가 발전되었다. 같은 글자를 여러 모양으로 나타낸 것으로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달나라 시대의 문자역사를 단군조선이 계승하면서 상형문자, 상음문자, 표음문자를 동시에 구가하던 문자대국이 된 것이다. 상음문자인 가림토 형태의 글자는 서방으로 전파되어 페니키아 문자, 수메르문자, 브라미문자가 되고 산스크리트가 된 것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28자는 서기전2181년 단군조선 초기에 정립되었던 가림토 38자를 그대로 계승하여 재정립한 글자가 된다. 모음 11자는 완전히 똑 같으며, 자음도 99% 같은 모양이고 그 음가들이 모두 같다. 다만, 훈민정음에는 유성음 ㄱ인 꼭지달린 ㅇ과 ㅎ이 새로 정리되었는데, 가림토 38자 중 ㅎ에 해당하는 글자는 x이며, 이 x가 ㅎ 소리가 나는 증거로는 저번 주에 소개하였던 세트신을 가림토로 표기한 '세 ㅁ x ㅡ"에서 소개한 바 있다.

 

우리 문자가 서방으로 전파된 증거되는 기록으로 부도지(符都誌)가 있는데, 서기전2185년경에 단군조선의 천사였던 유호씨(고씨이므로 고수씨임)가 하나라 우와 계에게 천도를 가르치다 우매하여 깨닫지 못하므로, 결국 포기하고 무리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전교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서쪽의 월식주(수메르, 동류럽 지역)에서는 소위 피라미드형태의 제단인 궁(穹)을 많이 만들고, 남쪽의 성생주(인도지역)에서는 탑모양의 소(巢)를 많이 만들고 있었으나 그 유래를 알지 못하므로, 유호씨가 옛일을 담당하고 있는 전고자(典古者)에게 그 유래를 설명하여 주었다는 취지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조상들이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는,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중 도산회의에 관한 기록에서 태자부루가 사공 우에게 오행치수법을 전수 할 때 왕토전문(王土篆文)의 천부왕인(天符王印)과 신침(神針)과 황구종(皇矩倧)의 세 가지 보물을 전수하였다고 하는바, 여기서 황토전문은 곧 단군조선의 문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황구종은 곧 홍범구주로서 단군조선의 글자가 담긴 책을 가리키고 있다. 

 

서기전267년 위(魏)나라 공빈(공자의 7세손이라고 함)이라는 사람이 지은 홍사(鴻史) 서문에 동이(東夷)라는 오래된 나라가 있으며, 황제(헌원)가 자부선인의 문하생으로서 자부선인으로부터 내황문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황문이 곧 삼황내문(三皇內文)인데 자부선인은 서기전2700년경 치우천왕 시대의 도인으로서 우서(雨書)를 만든 주인공이다.

 

서기전1120년경 은나라의 자작이라는 제후였던 기자(箕子)는 주무왕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고 단군조선으로 피신하여 단군조선의 제후(箕侯)가 되었는데, 사사이던 '왕수긍이 삼일신고를 단목판에 은문(갑골문)으로 새겨 기자에게 주어 기자가 읽었다'라고 하고, 단군조선 초기에 단군왕검께서 신하들에게 삼일신고를 강연하였는데, 이때 "고시씨가 동해 바닷가에서 캐어온 청석에다, 신지가 삼일신고를 새겼다"라고 대진국 제3대 문황제의 삼일신고봉장기에 기록되고 있다.

 

이와 같이 배달나라 시대와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우리조상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서기전925년에 왕문이라는 사람이 소위 예서체에 해당하는 부예(符隸)와 상형문자의 뜻이나 소리를 빌려 쓰는 이두문(吏讀文)을 만들었는데, 가림토 글자는 발음, 소리를 적는 방법이므로 문장을 쓸 때는 상형문자로 함으로써 문장이라는 문서로 남겨지지 않고, 명도전이나 유물 등에 단편적인 기재방법으로 내려온 것이 된다. 

 

특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그 글자는 이미 있던 글자의 모양을 본땄다라고 함으로써 단군조선의 가림토 글자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에 이러한 취지가 바로 나타나고 있다. 즉 옛 표음문자를 모방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첨수도나 명도전에 글자가 새겨진 이유를 서기전1680년에 자모전(子母錢)을 주조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는데, 이때의 자모라는 말은 자음과 모음이라는 표음문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첨수도와 명도전에 자음과 모음을 새겼다는 것을 가리킨다. 첨수도에 朝를 나타낸 옛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영락없이 '아사달'로 읽히며, 명도전에는 수많은 표음문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소위 첨수도와 명도전을 좀더 철저히 연구한다면, 단군조선 시대의 문자의 역사를 명백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훤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첨수도와 명도전을 전량 회수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세계문자의 근원 한배달조선 우리글" 특강 2부 (20170722)
(https://youtu.be/bJA_g-S01oc)

 


기사입력: 2017/07/24 [15:09]
최종편집: ⓒ 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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